4월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국은 이제 막 봄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시기죠? 이곳 타이완은 벌써 초여름의 향기가 살짝 느껴질 만큼 날씨가 따뜻해졌습니다. 낮에는 반팔을 입은 분들도 꽤 보일 정도인데요.
이렇게 기분 좋은 4월의 시작과 함께, 오늘은 한국 청취자 여러분께 조금 부러운 소식을 하나 전해드리려 합니다. 바로 내일부터 타이완은 4일간의 긴 황금연휴에 들어간다는 소식입니다.
“4월에 웬 연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타이완의 4월은 조금 특별합니다. 내일 4월 4일은 타이완의 어린이날인 아동절(兒童節)이고, 그다음 날인 4월 5일은 24절기 중 하나이자 조상의 묘를 돌보는 청명절(清明節)입니다. 보통 청명은 4월 4일에서 6일 사이에 오는데, 올해는 딱 5일에 걸렸습니다. 타이완은 공휴일이 주말과 겹치면 평일에 ‘보충 휴일’을 주는 제도가 있어서, 내일 금요일(3일)과 다음 주 월요일(6일)을 모두 쉽니다. 이렇게 온 가족이 모이고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연휴를 앞두고, 오늘 여러분께 꼭 소개하고 싶은 타이완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타이완 원주민 아이들의 순수한 시선을 담은 영화, <내가 어른이 되면(只要我長大)>입니다.
현재 타이완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원주민은 총 16개 부족에 달합니다. 각 부족마다 고유의 언어와 의상, 풍습이 다를 정도로 그 문화적 깊이가 어마어마하죠. 오늘 소개할 영화의 타이야(泰雅)어 제목인 ‘Lokah Laqi(로카 라퀴)’는 바로 이 부족 중 하나인 '타이야족'의 언어로 “얘들아, 힘내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천제야오(陳潔瑤) 감독은 타이완 최초의 원주민 여성 영화감독입니다. 영화의 배경인 타이중 환산 부락(環山部落)은 감독의 실제 고향은 아니지만, 같은 타이야족의 터전이라는 점에서 선택하게 되었죠. 덕분에 리얼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평단과 대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으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는데요. 제18회 타이베이 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최우수 장편영화상을 비롯해 감독상, 신인배우상, 편집상, 백만대상까지 무려 5관왕을 휩쓸며 그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또한 제53회 금마장(金馬獎) 영화제에서도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2017년에는 타이완을 대표하여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후보작으로 출품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은 산골 마을에서 자라는 세 소년—와단, 천하오, 린산의 일상을 따라갑니다. 겉보기엔 사냥을 하고 과일을 파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지만,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저마다의 시린 사연이 기다리고 있죠.
먼저 장난기 가득한 와단은 부모님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조부모 가정의 아이인데요. 할머니를 도와 채소를 팔며 일찍 철이 든 덕에 벌써 셈이 빠른 영특한 장사꾼이 다 됐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단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바로 도시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형 샤오롱이죠. 착하고 순박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검은 돈의 유혹에 빠져 조직 폭력배들과 어울리는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점잖은 매력의 천하오는 부락 내에서 꽤 유복한 과수원 집 아들이지만, 그 속사정은 조금 복잡합니다. 아빠와 엄마의 큰 나이 차이와 가치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한 엄마가 어린 천하오를 두고 도시로 떠나버렸기 때문인데요. 부족함 없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천하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엄마의 사랑에 대한 갈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통통한 귀염둥이 린산의 집은 겉보기엔 누구보다 화목해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린산의 아빠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무대에 서고 싶다는 비현실적인 꿈만 쫓으며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요. 술에 취하면 우울함에 빠져 가족들에게 손을 대는 폭력적인 성향까지 보여서, 린산은 늘 불안한 마음으로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자랍니다.
이 아이들은 어른들의 시선으로는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다고 말하겠지만, 영화는 이들을 절대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른들보다 더 낙천적이고 씩씩하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담백하게 그려냅니다.

이 아이들에겐 유일한 안식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휠체어를 탄 라와 선생님이 운영하는 방과후 교실입니다. 라와 선생님은 원래 도시에서 촉망받는 가수였지만, 사고로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한 빛 같은 존재지만, 선생님 본인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와단이 선생님의 과거 노래가 담긴 녹음테이프 하나를 발견합니다. “와, 우리 선생님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어?” 선생님의 목소리에 감동한 세 소년은 이제 무모하지만 용감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요. 바로 선생님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주기 위해, 이 테이프 하나를 손에 들고 무작정 대도시 타이베이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죠.
영화는 세 소년의 눈을 통해 타이완 원주민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보여줍니다. 부모님이 도시로 떠나며 남겨진 조부모 가정, 열악한 교육 자원, 도시와의 빈부격차 등 시린 현실이 담겨 있죠.
특히, 전통 가치와 현대 법규가 충돌하는 장면은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원주민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사냥’이 도시 법망에서는 ‘불법 포획’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누구를 위한 보호이고, 누구를 위한 법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가장 씁쓸한 장면 중 하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불쌍한 표정을 지어야 농산물이 잘 팔린다”고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원주민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차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하지만 감독은 이들을 비극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대자연과 공존하며 터득한 그들만의 낙천성과 끈기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미소로 삶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자라나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는 “어른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동화 같은 결말을 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장한다는 것은 때론 아픈 진실을 마주하고, 그 아픔을 견디며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임을 보여주죠.
초등학교 졸업식을 치르는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화려하진 않지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미래가 장밋빛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씩씩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4일간의 황금연휴, 타이완 곳곳은 조상을 기리는 향기와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으로 가득할 텐데요. 우리 곁의 모든 아이가,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오늘보다 더 건강하게 자라나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오늘 준비한 연예계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마지막 엔딩곡으로는 타이완의 실력파 신예 싱어송라이터, Sabrina 胡恂舞(후쉰우)의 <성장통(成長痛)>을 띄워드립니다. 이 노래와 함께 오늘 밤 편안하고 따뜻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RTI 한국어 방송, 진옥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