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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잉 라인’ 개통 기념행사 🎆
신베이시 산샤(三峽)와 잉거(鶯歌)를 잇는 지하철 ‘산잉 라인(三鶯線)’이 최근 개통되면서 현지에서 타이베이까지 이동 시간이 약 20분 단축되었습니다. 이를 기념해 지난 4일 잉거에 있는 신베이시립미술관에서는 성대한 불꽃쇼와 콘서트가 열려, 한여름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습니다.

산잉 라인 개통을 기념하는 라이트 쇼 현장 - 사진: 천이제 예술 스튜디오(陳怡潔藝術工作室)
같은 날, 미술관 건녀편에 자리한 산샤 역시 관광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특히 ‘산샤 옛거리(三峽老街)’에 있는 더우화(豆花) 맛집과 산샤의 명물 빵인 ‘금우각(金牛角)’ 가게 앞에는 긴 줄이 이어졌고요. 철도 마니아들도 산잉 라인 각 역에서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며 개통의 기쁨을 함께 나눴습니다.
산샤의 유명 더우화집 - 사진: 안우산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산샤의 또 다른 매력을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항일운동의 역사적 순간, 룽은푸(隆恩埔) 전투 🗡️
지금의 산샤 옛거리를 떠올리면, 다양한 먹기리와 아름다운 건축물이 먼저 생각나죠. 하지만 시간을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곳은 치열한 항일 전투의 무대였습니다. 당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되자, 일부 지식인들은 ‘타이완민주국(臺灣民主國)’을 세우고 일본군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 5월, 일본군이 현재 신베이시 궁랴오(貢寮)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을미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일본군에 맞서 타이완민주국 군대와 각지의 의용군, 청나라 잔여 병력이 힘을 모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산샤의 ‘산자오융 의용군(三角永義勇軍)’도 항전에 뛰어들었죠.
일본군이 타이완에 상륙한 지 약 두 달 뒤인 7월, 일본군은 산샤와 잉거 사이를 흐르는 다한시(大漢溪)를 따라 물자를 운송하던 중 산샤의 룽은푸(隆恩埔)에서 야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백, 의용군 200명의 기습 공격을 받았는데요. 결국 일본군 39명 중 4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전투는 바로 ‘룽은푸 전투’입니다.

1936년 일본 정부가 룽은푸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 사진: 위키백과
타이완인의 강한 항일 의지, 분수이룬(分水崙) 전투 🗡️
이후 일본군은 대규모 증원군을 투입해 분수이룬(分水崙)에서 다시 의용군과 맞붙었습니다. 4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 약 900명 중 200~300명이 전사한 반면, 약 3,000명의 의용군은 50명 정도의 희생만 치렀습니다. 이 전투는 ‘분수이룬 전투’로 불리고, 룽은푸 전투와 함께 을미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며, 타이완인의 강한 항일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두 전투 이후, 일본군은 다한시 유역에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며 의용군을 진압하려 했습니다. 산샤 옛거리의 건물과 지역의 대표 사찰인 조사묘(祖師廟)를 파괴하는 등 보복 행동도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다른 전선에서 일본군의 승전 소식이 잇따르자, 타이완민주국의 제2대 대총통 류융푸(劉永福)는 결국 타이완을 떠났는데요. 이때 지도자를 잃은 타이완민주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고, 을미전쟁 역시 1895년 11월 18일 끝을 맺었습니다.
의용군을 기념하며... 🙏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의용군의 정신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5년 을미전쟁 120주년을 맞아 산샤의 시민단체들은 타이완민주국의 국기 ‘남지황호기(藍地黃虎旗)’를 들고 기념행진을 펼쳤는데요. 산샤에 있는 국립타이베이대학 홍졘룽(洪健榮) 교수는 “타이완민주국이 붕괴한 후에도 각지의 의용군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고 평가했습니다.
타이완민주국의 국기 ‘남지황호기(藍地黃虎旗)’ - 사진: 위키백과
또 산샤의 위안산(鳶山) 공원에는 원래 룽은푸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철거되었습니다. 이어 1985년, 산샤 주민들은 같은 자리에 의용군을 기념하는 ‘광복기념종(光復紀念鐘)’을 세웠는데요. 산샤 출신 펑이수(彭一書) 신베이시의원에 따르면, 당시 초등학생들까지 용돈을 보내 종 건립에 힘을 보탰다고 합니다. 참고로, 현재 위안산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등산객 사이에서는 등산 명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산샤 의용군을 기념하는 ‘광복기념종(光復紀念鐘)’ - 사진: 위키백과 Outlookxp
이어서 산샤 출신 가수 린옌루(林晏如)의 대표곡 ‘맛이 변한 커피(走味的咖啡)’를 함께 들어보시죠.
산샤 발전에 크게 기여한 화가 리메이수 🧑🎨
옛거리에서 강을 건너면 ‘리메이수 기념관(李梅樹紀念館)’이 보이는데요. 리메이수는 산샤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조사묘의 복원도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02년생인 리메이수는 어릴 때부터 조사묘의 정교한 조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사범대학 재학 시절에는 서양화를 전공했습니다. 1920년 조각가 황투수이(黃土水)가 타이완인 최초로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자, 리메이수를 비롯한 많은 타이완 예술가들은 새로운 꿈을 품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리메이수는 1928년 화가 천청보(陳澄波)와 함께 일본 최고의 미술 교육기관이었던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산샤 출신 화가 리메이수 - 사진: 리메이수기념관
정치에 투신! 타이베이현장을 향해 ✨
예술가로 이름을 알리는 한편, 리메이수는 형 류칭강(劉清港, 어머니 성을 따름)의 영향을 받아 지방 정치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1934년 돌아온 후 산샤의 의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고, 1942년에는 산샤 찻잎조합 책임자를 맡아 차 산업의 기업화에도 힘썼습니다. 또 1946년 산샤가 진(鎮)으로 승격되면서 진민대표회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듬해 발생한 2·28사건에서는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습니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타이베이현 의원을 3차례 연임했습니다. 이후 현장 선거에 도전할 계획이었지만, 예술 활동과 재정적인 부담으로 뜻을 접게 되었고, 여러 예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조사묘 복원에 더욱 전념했습니다.
조사묘 복원을 주도한 리메이수 🔧
지난주 소개해 드렸다시피, 조사묘는 일본 식민지 초기 일본군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 복원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리메이수는 1947년 조사묘 복원 사업의 책임자로 선임된 후, 설계도부터 현장 감독까지 직접 맡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회화의 감각을 타이완 전통 사찰 건축에 접목해 조사묘를 ‘동방 예술의 전당’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공간으로 되살렸습니다. 황차이랑(黃才郎) 전 국립타이완미술관 관장은 이러한 리메이수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의 완벽주의와 토지 문제 등으로 인해 복원 공사는 그가 1983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산샤 조사묘의 복원 사업을 주도한 리메이수 - 사진: 리메이수기념관
리메이수 기념관은 유족이 1990년에 설립한 공간으로, 리메이수와 류친강의 작품과 유물을 전시했습니다. 2024년에는 타이베이대학교와 협력해 기념관 학장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요. 신베이시립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야오런시(姚仁喜)가 신관 설계를 맡았으며, 2029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완공될 예정입니다. 현재 기념관은 휴관 중지만, 앞으로 더욱 풍성한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죠.
다음 타이완 여행은 산샤로! ✈️
이렇게 2주에 걸쳐 산샤의 역사와 발전을 살펴봤습니다. 다양한 관광 코스부터 깊은 역사와 문화까지 품고 있는 산샤! 이제 산잉 라인을 이용하면 더욱 편리하게 찾아갈 수 있으니, 다음 타이완 여행 계획에 넣어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捷運三鶯線串聯城市文化軸線! 新北美術館無人機煙火展演登場 戴愛玲、婁峻碩、布拉瑞揚舞團接力演出」,新北市政府。
2. 張安蕎,「『三角湧』抗日120週年 三峽遊街紀念」,自由時報。
3. 徐子為,「李梅樹紀念館驚傳下月起『全面暫停對外營運』」,民視新聞網。
4. 〈年度大記事〉,李梅樹紀念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