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 60주년 회고, 포스트 시진핑시대 전망(3)
-2026.07.27.(월)-양안 ㆍ시사평론-
-20세기 인류 최악의 인재人災: 문화대혁명
-재마오화再毛化 가능성: 마오저둥 시대의 방식으로의 회귀 가능성 진단
-포스트 시진핑시대 전망
(오프닝)2026년, 올해는 중국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지 60년, 종결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페어위드재단이 주최한 관련 특강과 좌담을 취재 정리한 시리즈는 오늘 3부를 보내드리며 방송에서는 문화대혁명 세대를 풍자하는 중국 록음악의 대부 최건(崔健, 1961.8.2.베이징 출생 조선족 중국인)의 노래를 프로그램에서 조금 띄어드리고 방송 엔딩에서도 공유할 예정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문화대혁명은 인간성마저 상실한 20세기 인류 최악의 인화(인재人災)이며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끔찍한 재앙이라고 본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고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를 반성하며 더 나은 미래를 일궈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7월27일(월) 타이완 ㆍ한반도 ㆍ양안관계 및 시사평론은 7월20일(월) 시사평론 및 7월25일(토) 주간시사 에 이은 ‘문화혁명 60주년 회고, 포스트 시진핑 시대 전망’ 3부를 진행한다.
(삽입 음악) 붉은 깃발 아래의 세대(최건 작사ㆍ작곡ㆍ노래)
십여 년 동안 최고 실권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진핑, 소수의 집단이 정책 결정을 하는 과두정에서 1인이 독재로 결정하는 참주정으로 보이는 오늘날의 중공 지도부, 시진핑의 독재 시대가 계속될 것인지, 그가 후계자를 낙점한 후, 이른바 포스트 시진핑 시대에 중국공산당은 다시 과두정 체제로 회귀할지 주시하게 되는데, 문화대혁명 60주년 주제 특강 연사 우궈광 교수는 중공 정치 형태는 과두정치에서 개인독재로 발전해 온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데, 마오저둥은 개인독재가 절정에 이르렀던 사례이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정권을 이어받은 화궈펑도 개인독재 체제를 구축하려고는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결과 중공은 과두정 체제로 전환되었다.
화궈펑(華國鋒, 1921-2008년), 예젠잉(葉劍英, 1897-1986년),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년), 천윈(陳雲, 1905-1995년), 리셴녠(李先念, 1909-1992년),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년), 자오즈양(趙紫陽, 1919-2005년),,,, 이들의 이름은 현대사 뿐 아니라 뉴스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죽막’으로 불렸던 중국대륙이 마오저둥의 별세 이후 어떻게 변화할지 주시했다. 그런데 절대적 독재 마오저둥이 죽은 후 위의 중공 고위층들이 공동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과두정치 체제로 전환되었고, 지난 2부에서도 조금 언급했듯이 중공의 소수집단이 공동으로 이끄는 체제가 89년 베이징 톈안먼사건이 터지면서 변화하게 되었다. 바로 덩샤오핑의 1인 결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는 ‘내가 있는 한 내가 결정한다’란 말을 했었다.
그러다가 장저민ㆍ후진타오의 시대를 맞게 되는데 마침 양안간의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대표적인 예로, 1987년11월, 양안간의 인적 교류의 서막을 열게 한, 중화민국 노병들의 중국대륙 고향방문을 정식으로 개방하며 38년 간의 양안 단절을 깼다.)
중공이 과두정을 유지할 때 확실히 소수집단의 지도체제라고 여겼는데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차츰 과두정 체제가 부활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흐름을 배경으로 하여, 우궈광 교수는 개인독재자는 기존 독재자의 통치 아래에서는 성장할 수 없다는 말로 포스트 시진핑 시대의 체제를 암시한 것 같다. 즉 중공 지도체제는 과두정에서 참주정(독재), 또 독재에서 집단체제로 계속 전환되는 모종의 순환 법칙이 존재해 왔는데 독재자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땐 또 한 사람의 독재자가 그 밑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필자는 이해했다.
우 교수는 시진핑이 퇴진하거나 사망할 경우, 중국공산당이 다시 과두정치 체제로 회귀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전망했다.
토론인으로 참석한 국립타이완대학교 정치학과 장덩지(張登及) 교수는 문화대혁명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결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사건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 운영 방식과 정치적 역할 유형을 남긴 사건이라고 평가했는데, 그 영향은 오늘날의 중공 최고 지도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청나라 말기부터의 배경을 언급하며 문화대혁명의 발생 흐름을 분석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의 외래 침략은 여러 차례 있었다. 이중 20세기의 서막을 여는 1900년, 2차례의 ‘아편전쟁’에 이어 문호개방과 무역을 빙자한 여러 시도에 이어 8개 서양 열강들의 무력 공격이 수도에까지 근접하였다. 초호화 궁정화원 원명원의 값나가는 물건으로 보이는 건 다 챙기고 문헌 ㆍ도서와 그들이 가져가지 못하는 건 전부 불태운 사건은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그 시대를 겪었던 사람들은 더욱이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근대사에서 사실 청나라 제국주의가 무너진 후의 중국은 사실상 전체 사회가 분열되었고 급진적인 사상이 대두되며 불안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침략과 8년 간의 전면 전쟁에 이어 정권 다툼으로 이어진 국공내전은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고, 1949년 중국공산당이 대륙에서 완전한 정권을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며 추진된 건 바로 사회주의 개조이고, 그 과정에서 계급, 도시와 농촌 그리고 민족 문제 등의 구조적 모순이 발생하였다. 이것으로만 끝난 게 아니다. 장덩지 교수는 ‘중국공산당은 계획경제, 대기근, 국제적인 고립으로 추진된 자력갱생 및 제도의 일상적 운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관료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중공의 관료조직은 또 ‘딥 스테이트’에 해당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또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며 청산을 한 사건은 마오저둥에게는 충격이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한데 모여 사회대중들의 열정과 두려움과 기회주의가 한데 뒤섞이면서 ‘포퓰리즘’이 사실상 제도를 압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게 나중에 문화대혁명을 발동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본다.
마오저둥은 끊임없는 혁명과 대중 동원을 대표하고,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년)는 중국식 레닌주의와 당의 규율을 상징한다.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년)는 공통점을 추구하면서 차이를 인정하는 정치적 조정과 역할의 균형을 대표하며, 덩샤오핑은 '사상 해방', '실사구시', '단결하여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실용주의적 통치 노선을 상징한다. 다만 이러한 지도 스타일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결합되어 왔다고 장덩지 교수는 중공 정치의 몇 가지 지도 스타일 유형을 설명했다.
문화대혁명 이전, 1957년 중국공산당이 반우파 운동(反右運動)을 전개했을 당시,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은 이 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이후에는 '사상 해방', '실사구시(實事求是)', '일치단결',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向前看)'를 강조하며 이전과는 다른 정치 노선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는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공 2세대 지도자들은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한 예인데, 덩샤오핑은 집권 과정의 각 시기마다 실제로 다른 정책 결정 논리를 보여왔다.
'재마오화(再毛化)' 현상에 대해서 장덩지 교수는 정권 교체 이론의 관점에서 현재의 중국 정치 상황을 문화대혁명과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부에는 과거 저우언라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의 정치적 환경 역시 문화대혁명 당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문화대혁명의 본질은 집권파를 타도하고 딥 스테이트를 파괴하는 것이었던 것과는 달리 시진핑의 현재 통치 노선은 오히려 "딥 스테이트를 강화하는 것"에 가깝다고 평가했는데, 관료 특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집권 세력의 우위와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白兆美 / 취재ㆍ사진: 백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