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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이름으로 메이저리그에 오른 첫 타이완 선수 ⚾️
최근 몇 년간 프리미엄12나 WBC 같은 국제 야구대회에서 타이완 대표팀 경기를 보셨다면, 한 선수의 특별한 이름이 귀에 들어왔을 텐데요. 바로 현재 타이완 프로야구 ‘웨이취안 드래건스(味全龍)’에서 뛰고 있는 원주민 선수 끼리끼라오 공관(Giljegiljaw Kungkuan)입니다.
‘끼리끼라오’는 원주민 파이완족(排灣族) 언어로 ‘비바람을 막아주는 처마’를 뜻하고요. ‘공관’은 그의 가족 이름으로, 한족의 성씨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다양한 민족의 선수들을 만나고, 그들이 가진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경험한 후, 2018년 24살 때 자신의 이름을 한족 이름에서 파이완족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귀국 후에도 같은 이름으로 그라운드를 누벼왔죠. 원주민 이름으로 미국 메이저리그와 타이완 프로야구 무대에 오른 첫 번째 선수이기도 합니다.
타이완 프로야구 웨이취안 드래건스에서 뛰고 있는 원주민 선수 끼리끼라오 공관(Giljegiljaw Kungkuan)의 유니폼 - 사진: 웨이취안 드래건스
30년 이어진 원주민 권익 운동 ✊️
사실 타이완 원주민이 전통 이름으로 신분 등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인데요. 한족식 이름 없이 원주민 이름만 등록하는 것도 2024년 이후에야 가능해졌습니다. 원주민이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름뿐만 아니라, ‘원주민’이라는 표현도 1994년 8월 1일에, 헌법 개정을 통해서야 공식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원주민을 ‘산지동포(山地同胞)’라 불렀는데, 한족 중심의 관점에서 원주민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지워버리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죠. 이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 8월 1일은 2005년 ‘원주민의 날’로 지정되었고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2016년 8월 1일, 지난 400년간 원주민이 겪어온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 사과했습니다.
지난 2016년 8월 1일 ‘원주민의 날’을 맞아 정부를 대표해 원주민에게 사과한 차이잉원 전 총통 - 사긴: 총통부
타이완 최초의 도시형 원주민 공동체 ‘산잉부락’ 🏠
또 지난 8월 1일 원주민의 날을 맞아, 막 개통한 신베이시 지하철 ‘산잉 라인(三鶯線)’은 원주민 테마 열차를 선보였는데요. 신베이시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아메이족(阿美族)과 파이완족, 타이야족(泰雅族)의 문화를 바탕으로 열차를 장식했고, 타이베이대학역에서 열차가 도착할 때면 원주민 음악도 흘러나옵니다.
신베이시 지하철 ‘산잉 라인’이 최근 선보인 원주민 열차 - 사진: 신베이시 신문국 via CNA
그리고 타이베이대학 뒤에는 도심에서 보기 드문 원주민 마을 ‘산잉부락(三鶯部落)’이 자리하고 있는데, 주민들은 모두 타이완 동부에서 도시로 이주해 온 아메이족입니다. 이들은 산샤(三峽)와 잉거(鶯歌)를 잇는 산잉대교(三鶯大橋) 아래에서 살다가, 30년간 긴 투쟁 끝에 2018년, 지금의 자리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타이완 최초로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재건된 도시형 원주민 부락입니다.
▲관련 프로그램:
‘갈대숲 속 현대미술관’ 신베이시립미술관
‘산잉 라인’ 타고 떠나는 산샤(三峽) ① 차·장뇌·남염의 중심지
‘산잉 라인’ 타고 떠나는 산샤(三峽) ② 항일 역사와 화가 리메이수(李梅樹)
원주민의 날이 막 지나온 오늘, 아메이족의 마을 ‘산잉부락’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도시화의 그늘에서 탄생한 원주민 부락 🌆
1960~70년대 타이완에서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동부 화롄(花蓮)과 타이둥(台東)에 살던 원주민들도 생계를 위해 수도권으로 올라갔는데요. 하지만 높은 집세와 낯선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고향과 비슷한 환경을 찾아, 현지에서 구한 재료로 직접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타이완 원주민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아메이족은 수도권 하천을 따라 부락을 형성했는데, 산잉부락도 이 중 하나였습니다.
산잉부락은 산샤와 잉거 사이를 흐르는 다한시(大漢溪) 간척지에 있었고, 주민들은 막일이나 채소 재배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주민이 가장 많았을 때는 140가구에 달했으며, 투표로 대표를 뽑고, 회의를 열어 마을의 일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이처럼 열약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동네를 만들어냈죠. 하지만 법적으로는 명백한 불법 건축물이었습니다.
2008년 산잉부락 - 사진: 국가문화기억뱅크 / 신베이시 문화국
신베이시정부의 전신인 옛 타이베이현정부는 1994년부터 치수를 이유로 다한시 일대의 불법 건축물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부락 주민 대부분이 친족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했습니다. 정부가 철거해도 다시 집을 지었고, 철거와 재건축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 타이베이현정부 원주민행정국의 설립과 함께 전기가 찾아왔는데요. 현정부가 산잉부락 인근에 사회주택을 건설하고, 산잉부락을 비롯해 시주부락(溪洲部落), 샤오비탄부락(小碧潭部落) 등 여러 원주민 부락 주민들을 이주시키려 한 겁니다.
투쟁 끝에 이룬 새로운 보금자리 🏘️
7년 후 150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룽은푸 원주민 사회주택(隆恩埔國宅)’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입주 자격을 결정하는 방식은 부락의 공동체를 해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고, 결국 일부 주민만 사회주택에 입주했죠. 2008년 현정부가 다시 강제 철거를 추진하자, 원주민 권리를 지키려는 사회운동가들도 주민들의 투쟁에 합류했는데, 타이완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허우샤오셴(侯孝賢)도 체발로 주민들을 응원했습니다.
150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룽은푸 원주민 사회주택’ - 사진: 국가문화기억뱅크 / 신베이시 문화국
투쟁이 확대되자, 주민들은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정부에 이른바 ‘333 모델(333模式)’을 제안했습니다. 부락 건설 비용의 3분의 1은 주민들이 직접 마련하고, 또 다른 3분의 1은 주민들이 은행에서 대출받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정부가 부담하는 방식입니다. 합의가 이뤄진 후, 타이베이대학 근처에 3.4헥타르 규모의 ‘산샤 원주민 생활문화부락’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해 드린 현재의 산잉부락이죠. 2018년 새로운 부락이 완공되면서, 옛 산잉부락은 정식 철거되었습니다.
333 모델로 세워진 ‘산샤 원주민 생활문화부락’ - 사진: 신베이시 관광국
이어서 올해 금곡장에서 최우수 원주민 가수상을 받은 아메이족 가수 수밍 루피(Suming Rupi)의 수상작 ‘Mikerid’를 함께 들어보시죠. 아메이족 언어로 ‘길을 안내한다’는 뜻입니다.
집은 무너져도 공동체는 남는다! 🪢
과거 산잉부락의 주민들은 원주민 신분과 불법 건물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학교와 직장, 사회 곳곳에서 차별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화롄 아메이족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 마야우 비호(Mayaw Biho)가 2009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우리 집 앞에는 큰 강이 흐른다(我家門前有大河)》에 기록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는 타이둥에서 온 일가족이 1997년 산잉부락에 정착했고, 직접 지은 집에서 살았지만 정부에 의해 여라 차례 집을 철거당했습니다. 한때 산샤 시내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높은 집세와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다시 산잉부락으로 돌아갔죠. 그런데 이후 집이 또다시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보통 집이 철거되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겠죠.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런데 부락 주민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시 지으면 되지.” 이들에게 집은 몇 번 무너져도 다시 세울 수 있는 삶의 터전이자 공동체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사과에서 화해와 공존으로 ✨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이 원주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을 때, 타이완 역사가 롄헝(連橫)이 1920년에 발표한 《타이완통사(臺灣通史)》의 서언을 언급했는데요. “타이완에는 본래 역사가 없었다. 네덜란드인이 이를 열었고, 정씨 정권이 이를 일으켰으며, 청나라가 이를 경영했다.(臺灣固無史也。荷人啟之,鄭氏作之,清代營之。)”
차이 총통은 이러한 서술은 매우 한족 중심적인 관점이라며 사과했습니다. 실은 네덜란드인이 타이완에 오기 훨씬 전부터, 원주민은 이미 이 땅에서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었죠.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서 점차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타이완 사회가 경제성장의 결실을 누리는 동안에도 도시 변두리에서 살아갈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공동체의 힘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해 왔습니다.
원주민의 권익은 원주민의 날에만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타이완 사회가 언제나 마음에 두어햐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민족 간의 화해와 공존을 어떻게 이어갈지, 우리 모두가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楊惠君,「【原住民】吉力吉撈・鞏冠/Giljegiljaw Kungkuan:遮風擋雨的排灣族棒球勇士,把族名穿在「身上」找回自我認同」,少年報導者。
2. 〈「原住民族日」—臺灣社會和解與和諧的開始!〉,行政院。
3. 〈總統代表政府向原住民族道歉〉,總統府。
4. 黃旭昇,「新北三鶯線原民彩繪列車開箱 隨機發車添驚喜」,中央社。
5. 林雨佑,「台灣第一個都市型部落誕生:三鶯部落「333模式」的異地重建想像」,報導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