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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생애 마지막 육필 서찰 - 큐레이터 천지엔즈陳建志 인터뷰

국립고궁박물원 국보 송대 소동파 '치지현조봉척도(致知縣朝奉尺牘)'. -사진: jennifer pai백조미
국립고궁박물원 국보 송대 소동파 '치지현조봉척도(致知縣朝奉尺牘)'. -사진: jennifer pai백조미

소동파 생애 마지막 육필 서찰-2023년1분기 고궁 국보 해설 –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이하 ‘고궁’)에는 근 70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중 ‘국보’로 지정된 유물은 그리 많지 않다. 2021년 연말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국보’는 268점에 불과하며, 이 외에 중요 고물(고물: 고대유물)과 일반 고물은 각각 754점과 35점으로 이 모두를 합쳐도 1,057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궁의 국보는 더욱이 희소성과 중요성을 띄고 있는데 2021년 시월 10년 만에 고궁 3대 국보가 한 자리에 나와 영상으로도 제작하여 방송하였던 바 있다(관련 기사: https://kr.rti.org.tw/radio/programMessageView/programId/5/id/1658 영상: https://youtu.be/MbtHQf5JZ7A ). 해당 3대 국보 회화 작품은 미술사를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는 걸작이다. 그럼 그 외에는 어떠한 국보가 있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오늘은 단 한 점 만을 예로 들어본다. 북송시대 소식(蘇軾, 생몰: 1037~1101년), 한국에서는 그의 호 ‘소동파’로 더 잘 알려진 근 1천년 전의 대문호의 국보 작품을 소개한다. 소동파의 서예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하면 아무래도 황주(黃州)에서 지은 한식날 관련 시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약칭 ‘한식첩’, 1081년 늦은 봄에 씀)’을 최고로 꼽을 수 있는데 미술사에서는 한식첩을 ‘천하 제3 행서(行書)’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외에 소동파의 문학 작품 ‘전.후 적벽부(赤壁賦)’는 고궁에 다른 주요 서예가들이 쓰거나 미술가들이 그림으로 그려 이중 국보와 중요고물 등에 속하는 작품이 여러 점 있는데 그 만큼 소동파가 후세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소개할 ‘치지현조봉척독(致知縣朝奉尺牘, 치: 전하다 / 지현: 縣의 행정을 맡아 총괄하는 관원 / 조봉: 관직 명칭 / 척도: 편지)’ 서예 작품은 ‘강상첩(江上帖)’ 또는 ‘해후첩(邂逅帖)’이라고도 부른다. 오랜 친구를 우연히 강에서 만났기에 ‘강상첩’ 그리고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해후첩’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다. 총 59글자의 짧은 글이지만 진실과 성의가 담겨져 있는 문장이다.

‘치지현조봉척독’이라는 이 편지가 왜 중요할까? 가장 쉽게 말한다면 이 서찰은 현존 소동파의 마지막 남겨진 글이라는 것이다. 그냥 마지막 육필이라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이 어떠하길래 국보가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 보겠다.

소동파가 타계하기 몇 달 전에 쓴 ‘치지현조봉척독’은 양가 가정의 어르신들과 자녀 등 4대의 가족들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절친 사이인 두맹견(杜孟堅)에게 쓴 짧은 안부 편지이다.

서기 1100년, 송휘종이 즉위하면서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하여 소동파도 유배지(좌천된 곳) 담주(儋州, 지금의 허난성(하남성海南省 담현儋縣)에서 풀려나 금릉(金陵, 지금의 난징南京)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강에서 8년 만에 친한 벗 두맹견을 만났다. 소동파와 두맹견 양가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는 집안이어서 그동안의 추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는데, 부단히 좌천되며 벽지에서 중.장년 시기를 보낸 그는 세상만사가 부질없이 날리는 먼지와도 같다고 한탄하며 덧없는 인생에 대해 감개가 무량함을 표현하였다. 지금의 난징에서 이 편지를 쓴 후 수도로 복귀하기 위해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겨우  3개월 후 강소성(江蘇省) 남부 상주(常州)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고궁 서화문헌처(書畫文獻處) 연구원 천지엔즈(陳建志)는 인터뷰에서 “(전시실에) 소동파가 살아온 인생 과정 자취를 따라 지도를 그려넣어서, 출생지 (마파두부로 유명한) 스촨(四川), 수도 볜징(변경-汴京, 현 카이펑(개봉開封)), 그리고 (그 많은 곳 중에서도) 그가 평생 가장 잊지 못하는 3곳 황주(黃州, 현 후베이성湖北省 황강시黃岡市), 혜주(惠州, 현 광동성 내의 도시), 담주(儋州, 현 허난성海南省 단현儋縣) (등지를 표시했습니다). 이 글은 유배지인 오늘날의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수도 변경(汴京)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금의 난징시에서) 쓴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서찰을 통해 소동파의 서예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동파의 출생에서부터 세상을 떠나기 까지의 살아온 과정, 그의 인생 역정을 (이 전시에서 만나) 볼 수 있어서 (전시는) 그의 대한 회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립고궁박물원 국보 송대 소동파 '치지현조봉척도' 특전 큐레이터 고궁 서화문헌처 천지엔즈(陳建志) 연구원. -사진: jennifer pai백조미) 所以我們在展場也放了蘇軾的行蹤遊跡圖,從他出生的地方四川,大家很熟知的麻婆豆腐啊四川,然後到汴京,然後到他一生中最難忘的三個城市黃州、惠州、儋州。從海南島回汴京的時候寫下的。… 所以這件作品一方面可以觀賞他的書法字,一方面也可以知道他整個人生的一些遊歷的歷程,從一開始出生到離世的一個過程裡面,對他的一些回想。

소동파는 송대 4대 서예가 중의 1등으로 꼽힌다. 하지만 미술(서예도 미술에 속함)에 대한 감상자들의 호불호가 있기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한 의미를 모를 경우 이보다 잘 쓴 글은 허다하다고 말씀하실 분이 분명 계실 것이다.

예술 작품은 호불호를 떠나 이게 왜 중요한가? 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이해하면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그럼을 실물과 똑같이 잘 그렀다고 한다면 사진기로 충분히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잘 훈련되어 스킬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획기적인 그 무엇이 될 수는 없다. 하나의 작품이 중요하다는 건 그 작품이 위대한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졌거나 그 작품은 전례없는 혁신적인 이정표가 될 수 있거나, 그 작품이 후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거나 극히 희소성을 띄면서도 예술적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의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소동파의 절친 황정견(黃庭堅)은 소동파가 황주에서 쓴 ‘한식첩’ 작품 뒤에 발문에서 ‘소동파의 한식첩의 시문은 이태백의 것과 유사한데 아마 이태백도 이렇게까지는 쓰지 못했을 것이며, 서예는 안진경, 양응식, 이건중의 붓놀림을 모두 겸하였다’라며 만약 소동파로 하여금 이 시를 다시 한 번 써보라고 하면 이것만큼 다시 써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극찬을 하였다. 정말 그렇다.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정견은 또한 소동파의 글은 마치 둘에 눌린 두꺼비와도 같다고 했는데 그건 비웃는 게 아니라 그글이 주는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다. 소동파 만년의 글은 그의 풍부한 감성처럼 진하고 촉촉하다.

큐레이터, 고궁 서화문헌처 연구원 천지엔즈(陳建志)는 관람객들이 소동파가 이 편지를 쓸 때의 심경을 좀더 이해할 수 있도록 임종을 앞둔 소동파가 그의 셋째 아들 소과(蘇過)에게 써준 철언절구 시 ‘관조(觀潮), 별칭 ‘여산연우廬山煙雨’를 소개하였다. (관: 보다 / 조: 밀물, 조수)

옛부터 절강성(浙江) 최대 강 전당강(錢塘江, 전장 6천km. 전당강을 ‘절강浙江’이라고도 부름)의 조수를 구경한다는 시인데, 그 내용은 ‘여산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연우(안개비)와 전당강의 웅장한 조수는 꼭 한 번 직접 관람할 가치가 있다. 이를 직접 가서 볼 수 없다면 평생 아쉽고 유감스러울 것이다. 난 드디어 여산과 절강(전당강)에서 뿌옇게 내리는 안개비와 거세게 일고 부딪쳐 솟구치는 조석(밀물과 썰물)을 보았는데, 그리 특별한 느낌은 없고 여산의 연우는 그저 여산의 연우이고, 절강의 조수는 그저 절강의 조수라고만 여겨진다.라는 내용의 시문이다. 세상만사 부질없다라는 걸 표현한 것인지 이제 속세의 모든 속박에서 해탈하였다는 걸 의미하는지 보는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에 맡기는 게 더 좋을 듯한데, 만약 조금 해설을 하자면 여산의 연우는 그저 여산의 연우이고 절강의 조수는 그저 절강의 조수는 글자 그대로 ‘그게 그저 그렇다’로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아~ 그게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는 불교 좌선의 깨달음도 내포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소동파는 항주(杭州) 자사(刺史)로 있을 때 이미 연우와 조수를 구경했던 바 지나간 일은 다 덧없는 것이라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인생은 여하튼 겪어 봐야한다는 의미도 답겨졌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역사 인물 중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소동파의 글이 지금까지 남겨져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白兆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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