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지난주에 타이완해협 전쟁을 주제로 작성된 소설을 소개해 드렸는데 오늘은 타이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전쟁소설 《이역(異域)》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역》은 타이완 작가 보양(柏楊)이 덩커바오(鄧克保)라는 필명으로 1961년《자립석간신문(自立新聞)》에서 연재하다 큰 인기를 얻어 같은 해 출판된 소설입니다. 주로 1949년부터 1954년까지 국공내전 패배로 미얀마, 태국, 라오스 접경지대로 피신한 중화민국 국군, 이른바 고군(孤軍)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역》은 덩커바오의 1인칭 관점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애초에 기록문학으로 많이 여겨졌는데 사실은 보양이 《자립석간신문》에서 일했던 동안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덩커바오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은 대부분 실존 중화민국 국군입니다. 보양은 백색테러 시절에 미국 만화 《뽀빠이(Popeye)》를 번역하다 때 장제스와 장징궈를 풍자하는 혐의로 10년 동안 수감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들이 거의 모두 금서가 되었고 오직 필명으로 작성된 《이역》만 재앙을 피했으며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독자의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90년 영화로 개편된 후 고군 이야기가 더욱 주목되었습니다.

덩커바오(鄧克保)라는 필명으로 《이역(異域)》을 작성한 타이완 작가 보양(柏楊) - 사진: 보양박물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국공내전에서 약세를 보였던 중화민국 국군은 뎬난(滇南, 중국 윈난성 이남 지역)전쟁 후 제8군과 제26군만 살아남았습니다. 제8군에 속한 주인공 덩커바오는 제8군 단장 리궈훼이(李國輝)를 따라 미얀마로 피신했습니다. 당시 제26군은 주태국 중화민국대사관을 통해 타이완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리궈훼이의 설득으로 결국 미얀마에서 제8군과 함께 약 1,500명의 ‘중화민국부흥부대’를 결성했습니다.
중국 상인 조직 ‘마방(馬幫)과 화교들의 협조로 고군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고군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미얀마 군대가 많은 화교를 체포하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문란한 군기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물자가 매우 결핍한 고군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번 승리로 고군은 동남아시아 각국의 언론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고 장제스의 주목도 끌었습니다. 그 후 미얀마에서 반공대학교를 설립해 화교와 반정부 입장을 지닌 미얀마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신입생을 모집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통해 고군은 1951년 중국 윈난에 있는 마을 14개를 되찾았는데, 공산당의 반격으로 결국 미얀마로 다시 피신했지만 이번 행동은 중화민국을 조국으로 여기는 많은 사람을 고군에 가입시켰습니다. 당시 고군은 20,000명에 달했고 미얀마에서 타이완보다 3배나 큰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덩커바오(鄧克保)의 딸과 아들은 전쟁에서 안타깝게 잇달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딸을 치료하기 위해 태국 방콕으로 갔는데 막상 가서 고위층 인사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놀라워했습니다. 월급으로 겨우 0.5 미국 달러를 받았던 고군은 최전선에서 조국을 되찾을 수 있도록 피눈물을 흘렸는데 고위층 인사들이 번화한 도시에서 가만히 앉아서 성과만 누렸습니다. 인맥이 없는 고군의 가족들이 심지어 차별을 당해 편안한 생활조차 누리지 못했습니다. 덩커바오는 “나는 방콕이나 타이베이에서 집을 산 사람과 다르게 최전선에 돌아갔다.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용감한 게 아니라 더 이상 마음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선택한 거다. 나는 죽어도 조국에서 죽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봐서 원래 방콕에서 살기로 결심했던 덩커바오의 부인도 “우리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1953년 미얀마 정부가 소련과 함께 유엔에서 중화민국을 침략으로 고소했고 고군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중국, 미국, 미얀마, 태국은 4개국 회의를 열어 장제스 정부에 압력을 가해 결국 고군을 타이완으로 철수시켰습니다. 타이완으로 가던 길에 덩커바오가 탄 비행기는 사고가 나서 태국에 불시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덩커바오는 조종사가 먼저 도주할까봐 조종석에 가서 확인했는데, 조종사가 “우리는 마지막 승객이 떠날 때까지 비행기를 지킬 것”이라고 하자 그는 조종사를 의심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철수를 주장한 사람들은 맨날 전반적 정세를 고려해라, 당신은 시야가 참 좁다고 했는데 나는 이 세상에서 단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며 고군의 처지를 탄식했습니다. 조종사의 말 듣고 덩커바오는 편안한 제2의 인생을 포기했고 최전선에 다시 투신했습니다.
덩커바오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지만 고군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54년 계속 미얀마나 태국에 남아있던 군인들은 중화민국 국군이 아닌 ‘윈난인민반공지원군(雲南人民反共志願軍)’으로 재출발했습니다. 1960년 중국과 미얀마는 국경조약을 체결했으며 고군을 미얀마에서 철수시켰습니다. 일부 고군은 타이완과 라오스로 가고 나머지 사람은 태국 정부를 협조해 태국에 있던 공산당과 전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당을 격퇴한 고군들은 결국 태국 국왕으로부터 태국 영주권을 받아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도이매쌀롱(Doi Mae Salong)에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고군 이야기를 기록하는 박물관 ‘태북의민문사관(泰北義民文史館)’도 도이매쌀롱에서 설립되었습니다.

타이완 작가 보양(柏楊)이 태국 도이매쌀롱(Doi Mae Salong) '태북의민문사관(泰北義民文史館)'에서 남긴 글 - 사진: 안우산
「被遺忘的人,他們戰死,便是與草木同朽;他們戰勝,仍是天地不容。」
'잊혀진 사람들은 전사하면 초목과 함께 시든다. 설령 이겨도 천지가 여전히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역》을 통해 타이완인이 고군의 고난을 알게 되었고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중화민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태국에 남아있는 고군과 그들의 후손은 법적 제한으로 중화민국 국민 신분을 취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십여 년 간의 쟁취를 통해 상황이 점차 호전되었습니다. 이역에서 전사한 고군 영웅들은 저희 방송국 근처에 있는 ‘국민혁명충렬사(國民革命忠烈祠)’에 붕안되었습니다. 타이완으로 온 고군들은 타오위안(桃園) 중전신춘(忠貞新村), 난터우(南投) 칭징농장(清境農場), 그리고 지난주 <랜드마크 원정대>에서 소개해 드린 신베이시 중허(中和) 화신제(華新街)에서 정착하게 되었고 중국 윈남, 태국, 미얀마 요리를 타이완으로 들여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군들의 타이완 이야기와 제가 실제로 도이매쌀롱에서 한 달 동안 생활했던 경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엔딩곡으로 《이역》의 동명영화 OST ‘집이 너무 멀다(家,太遠了)’를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가수는 왕제(王傑)입니다. 후렴에서 반복하는 가사는 마침 소설에서 등장한 문구와 일맥상통입니다.
우리는 집이 없다. 我們沒有家 我們沒有家
고아는 우리의 이름이다. 孤兒是我們的名字
집에 가는 것은 꿈에서 나오는 외침이다. 回家是夢裡的呼喚
너무 멀다. 집이… 太遠了 我們的家
‘무한강산이 우리와 같은 고신얼자(孤臣孽子, 임금의 믿음을 받지 못하는 신하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서자)를 갈 곳이 없게 만들었다.’
「無限江山,卻把我們這一群孤臣孽子,逼得無立足之地。」
‘우리는 항상 우는다. 누물은 우리의 상처를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자신과 고난 속에 있는 동포들을 위해 노래하고 눈물을 흘린다.’
「我們是常哭的,因為眼淚可以洗浴我們的創傷,我們常常高歌,為我們自己,為我們前途,也為廣大的苦難同胞,聲淚俱下。」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柏楊,《異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