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문학의 향기를 담아, 지금 <포르모사 문학관>의 문을 엽니다.
좋은 결말이란? 🛌
인류의 기대 수명이 늘어지면서 이제 ‘100세 시대’가 머지않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오래 사는 건 축복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과연 어떤 임종이 우리에게 ‘좋은 결말’일까요?
많은 타이완사람들은 잠든 사이에 아무런 고통 없이 조용히 떠나는 걸 이상적인 죽음, 즉 ‘선종(善終)’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 11월 17일, 76세로 생을 마감한 의사이자 작가 천야오창(陳耀昌)선생님의 생각은 조금 달랐는데요. 그는 2년 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가장 무서운 상황은 아무런 걱정도, 심리적 준비도 없이 그냥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감사나 작별 인사 한마디 못 한 채,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 곁에서 떠나고 남은 이들이 그 뒤를 수습해야 한다. 그래서 차라리 깨어 있을 때 죽는 게 낮다. 특히 유언을 남길 수 있을 때가 좋다. 다들 암을 무서워하지만, 사실 암은 가장 따뜻한 죽음 방식이다. 천천히 모든 것을 정리하거나 생전 장례식을 치를 수도 있고, 안락사를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 대해 네티즌들은 찬반 의견을 남겼지만,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 결국 “인생은 참 무상하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내가 원하는 방식과 시간에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조금은 덜 무서울까요? 아마도 천야오창 선생님은 의사이자 암 환자로서 누구보다 질병에 맞설 용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학, 문학, 역사 등 연구에 너무나 큰 포부를 갖고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때까지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욱 강했을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스카뤄(斯卡羅)> 원작 작가 ✏️
대부분 타이완사람들이 천야오창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계기는 아무래도 역사 드라마 <스카뤄(斯卡羅)>였을 텐데요. 이 드라마는 바로 천야오창의 소설 《괴뢰화(傀儡花)》를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1867년 타이완 최남단 헝춘(恆春)에서 발생한 ‘로버호 사건(羅發號事件)’을 바탕으로 타이완 원주민이 미국과 국제조약을 체결하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요. 드라마의 흥행과 함께 원작 소설도 다시 주목을 받았고, 천야오창의 이름 역시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그럼 오늘은 타이완 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천야오창의 삶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골수이식과 줄기세포 연구의 1인자 🧑⚕️
천야오창에게는 정말 다양한 얼굴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의사죠. 타이완대병원 혈액종양내과에서 30여 년 근무했고, 1983년에는 타이완 최초로 골수이식에 성공하면서 훗날 골수은행이 자리 잡는 데 중요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동시에 타이완의 의학 연구 기구인 ‘국가위생연구소’에서 줄기세포 센터장을 맡아 관련 연구에 몰두했고, 또 <법의학자 법(法醫師法)> 제정과 한센병 환자들의 권익 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이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는데요. 재생의학의 응용과 보급을 위해 직접 회사를 차려 학술계에서 산업계로 활동 무대를 넓혔습니다. 이렇게만 들어도 그의 인생은 한 편의 의학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드라마틱하죠.
이렇게 바쁜 와중에, 2012년 또 하나의 새로운 타이틀을 안게 되었는데, 바로 ‘63세의 신예 작가’입니다. 그의 데뷔작은 타이완 네덜란드 시대와 정씨왕국의 정권교체 시기를 다룬 대하소설 《포르모사 삼족기(福爾摩沙三族記)》입니다. 제목만 봐도 스케일이 느껴지죠? 제목 속 ‘삼족’은 17세기 타이완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던 세 집단을 가리킵니다. 바로 타이완 원주민, 네덜란드인, 그리고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한족입니다. 천야오창은 이들을 생생한 캐릭터로 그려내며, 교과서에서 한두 줄로 지나가 버리던 파란만장한 시대를 눈앞에 펼쳐 보였습니다. 이 시대는 타이완이 국제무대에 등장한 400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점의 하나이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이완’이 형성되기 시작한 핵심 시점입니다.

천야오창의 데뷔작 《포르모사 삼족기(福爾摩沙三族記)》 - 사진: 청핌서점
내 조상은 네덜란드인? 👩🦰
그런데, 이처럼 눈부신 성취를 거둔 의사는 왜 작가의 펜을 들게 되었을까요?
타이완 남부 타이난(台南) 출신인 천야오창은 어느 해 성묘하러 고향집에 갔다가 아주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집안의 초대 조상이 네덜란드 여성이라는 사실이었는데요. 이 한마디가 그의 마음속에 마치 천둥처럼 내려치면서, 그는 세계관이 흔들릴 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족보가 남아 있지 않아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큰 체격, 그리고 자신의 곱슬머리와 짙은 턱수염을 “그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도 바로 이러한 애매한 부분이 그에게 상상을 펼칠 수 있는 넓은 여지를 만들어 주었고, 결국 그를 소설 창작의 길로 이끌었죠.
언뜻 들으면, 데이터와 증거를 중시하는 의사와 상상력이 필수인 소설가는 꽤 거리가 있는 직업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천야오창은 오히려 환자의 증상을 듣고 병을 추론하듯 남겨진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세월을 해석했습니다. 2015년에 발표된 《섬의 DNA(島嶼DNA)》에서는 위나선균(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강직성 척추염, 비인강암 같은 질병을 단서로 타이완사람의 조상을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의사의 시선과 대담한 상상력을 통해 타이완 역사를 또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그려낸 거죠.

질병 DNA로 타이완인의 조상을 추정하는 《섬의 DNA(島嶼DNA)》 - 사진: 보커라이
이어서 핑둥 타우(泰武)초등학교의 파이완족(排灣族) 합창단이 부른 ‘추억이 깃든 춤 노래(sine venge, 充滿回憶的舞歌)’를 함께 들어보시죠. 이 합창단을 이끄는 지도교사는 드라마 <스카뤄>에서 원주민 우두머리 역을 맡은 배우이자 음악가 차마커·파라우러(Camake Valaule, 查馬克·法拉屋樂)입니다.
타이완 3부작 🌼《괴뢰화》《사두화》《고련화》
이처럼 진입장벽이 높은 역사 장편소설로 화려하게 등단한 뒤, 천야오창은 “타이완을 위해 역사를 남기고, 역사를 위해 타이완의 이름을 남긴다”는 마음으로 역사소설 집필을 이어갔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앞서 언급한 《괴뢰화》, 그리고 후속작 《사두화(獅頭花)》와 《고련화(苦楝花)》로 구성된 ‘타이완 3부작’입니다.
천야오창의 타이완 3부작 - 사진: 聚珍臺灣
《괴뢰화》제목 유래 🦋
세 작품의 제목에는 모두 꽃 ‘화(花)’자가 들어가지만, 여기서 꽃이 꼭 실제 꽃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1부부터 살펴보면요, ‘과뢰화(傀儡花)’는 원래 헝춘 지역 한족들이 걸음이 빠른 원주민을 보고, 인형극 속 인형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인 ‘괴뢰번(傀儡番)’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번’자는 타이완어로 ‘huan’이라고 읽는데, ‘미개한 사람’을 뜻하는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입니다. 그래서 천야오창은 이런 차별적인 표현을 소설 속 여성 주인공 뎨메이(蝶妹)를 상징하는 꽃 ‘화’자로 바꿨죠. 이 작품은 2016년 타이완문학상 ‘금전장(金典獎)’ 장편소설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 금전장 시상식에 참석한 천야오창 - 사진: 문화부
그렇다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제목은 왜 <스카뤄>일까요? 바로 ‘괴뢰번’이 지닌 부정적 의미 때문이죠. 제작진은 온라인 투표를 통해 보다 중립적인 명사, 즉 당시 현지 원주민의 부족 이름인 ‘스카뤄’를 선택했습니다. 만약 역사 소설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드라마를 통해 타이완 역사를 만나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영상으로 먼저 보고, 나중에 소설을 읽어보시면 또 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타이완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타이완의 역사를 직접 써 내려갔던 작가, 천야오창 선생님. 그의 나머지 작품들과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주에 이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趙靜瑜,「陳耀昌76歲逝世 台灣首位骨髓移植醫師、斯卡羅原著作家」,中央社。
2. 黃明惠,「陳耀昌76歲病逝...血液腫瘤權威、骨髓移植教父!罹攝護腺癌說不會瞎操心:要離世,我寧可醒著時發生」,今週刊。
3. 張鐵志,「紀念陳耀昌:以醫學、文學與歷史重構島嶼的 DNA」,Verse。
4. 蘇惠昭,「幹細胞專家陳耀昌的福爾摩沙夢」,台灣光華雜誌。
5. 愛德華,「『傀儡花』與『斯卡羅』意思,原有何涵義?」,愛德華FUN電影。
▲관련 프로그램:
타이완 최남단 헝춘(恆春)에서 물놀이 말고 뭘 하면 좋을까? 동아시아 정세 바꾼 역사의 현장으로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