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the main content block
::: | 사이트 맵| Podcasts|
|
Language

Formosa Dream Chasers - Programs - RTI Radio Taiwan International-logo

프로그램
| 전체보기
카테고리
진행자 프로그램 편성표
푸시 알림
繁體中文 简体中文 English Français Deutsch Indonesian 日本語 한국어 Русский Español ภาษาไทย Tiếng Việt Tagalog Bahasa Melayu Українська 사이트맵

소동파, 황주 유배 3년에 쓴 역대 3대 행서 -고궁박물원 제대로 알기(토) - 2025-12-13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1).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1).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1).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1).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3).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3).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적벽부(赤壁賦)” 국부.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적벽부(赤壁賦)” 국부.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2).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송나라(북송시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국부(2).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소동파, 황주 유배 3년에 쓴 역대 3대 행서 감상

-2025.12.13.

-국립고궁박물원 제대로 알기

-당 ㆍ송 8대가, 최고의 문호 소동파

-소동파가 황주로 좌천되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1,080~1084) 창작한 불후의 명작들 ‘()적벽부(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 ‘한식첩(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염노교(念奴嬌, 사패詞牌 이름)ㆍ적벽회고(赤壁懷古)’, ‘임강선(臨江仙, 사패詞牌 이름)ㆍ야귀임고(夜歸臨皋)’, ‘복산자(卜算子, 사패詞牌 이름)ㆍ황주정혜원우거작(州定慧院寓居作)’…

-국립고궁박물원은 송동파의 명작 가운데 그가 친필로 쓴 적벽부한식첩을 소장하고 있다.

-‘고궁 100+’ 특별전시 시리즈 가운데 갑자만년특전으로 소동파의 서예 적벽부가 전시된 데 이어, 지금은 역대 서예 3대 행서로 불리는 황주한식시첩이 전시되고 있다.

-오늘은 현재(2025.11.20.~2026.01.04.) 전시 중인 한식첩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본다.


소동파, 오대시안(烏臺詩案)

삼국시대 적벽대전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연의소설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소설 외의 문학 작품, 서예 작품으로는 소동파의 적벽부가 으뜸이다.

어떠한 이름, 단어, 소리, 냄새, 풍경,,, 보고나 들렸을 때 순간적으로 눈물이 날 때가 있다. 필자에게는 소동파라는 역사 인물과 한식첩이라는 서예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국립고궁박물원에 재직할 때, 또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한식첩을 직접 가서 감상할 수가 있었다.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전시가 되기에 절대로 놓치지 않는 작품 감상 시간으로 여겨왔다. 아주 큰 행운이라 생각하면서

한식첩은 이름 그대로 한식날과 관련된 내용의 시문이다. 이 불멸의 작품이 탄생하기 바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배경부터 살펴본다.

송나라 신종(宋神宗) 원풍(1,078~1085) 2(1079), 소동파(蘇東坡, 1,037~1,101)는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후저우(湖州)시 관직에 있을 때였다. 당시 중앙 감찰기관인 어사대(御史臺)‘관원이 소식(蘇軾)호주사상표(湖州謝上表)’부적시(不適時) / 불생사(不生事)’ 등의 문구가 있고, 그 외에 수많은 시문에도 신법(개혁법안, 특히 희녕熙寧변법)과 조정 그리고 황제를 풍자하는 글들이 있다는 이유로 소동파를 체포하여 신문하였다.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이른바 문자옥(文字獄)’으로, 문장의 어느 한 구절에 모반의 의도가 보인다는 핑계로 사람을 잡아들여 그 죄를 덮어씌웠다. 이게 그 유명한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오대(烏臺)란 원래 감찰기관 어사대를 지칭하는데, 어사대 주변에는 측백나무를 아주 많이 심었고, 거기에 까마귀떼들이 자주 모이게 되어 측백나무를 뜻하는 백대(柏臺)’ 또는 까마귀를 뜻하는 오대(烏臺)’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상 문장때문에 억울하게 좌천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하는 사건들이 여럿 있지만 소동파의 오대시안은 역사에서는 북송시대 최대규모의 문자옥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오대시안이 특히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문학 기질이나 예술성을 높이 사는 사람들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늘 이 오대시안을 읽고 슬퍼하며 분노하게 된다. 사실상 오대시안은 소동파의 정치 생애의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사건이자, 이 사건으로 거의 죽음에까지 도달하였으나 그의 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파(개혁파)이며 신종 황제의 측근 재상 왕안석(王安石)과 한강(韓絳), 그리고 친동생 소철(蘇轍), 소동파의 동료이자 친한 벗들이 소동파가 지은 시에는 모반하려는 실질적인 의도는 없었다라며 간청하는 한편, 그의 재능을 특히 강조하면서 황주(黃州, 오늘날의 후베이(湖北)성 황강(黃岡)) 좌천되는 것으로 그쳤다. 관직은 있지만 사실상 녹봉이 없는 처지이며 그 누구도 거느리지 못하도록 하였던 처분으로 일상 생활마저 어려웠던 유배시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황주에 가서 물질적으로는 살 집도 없고, 먹을 것도 모자란 형편이지만 우리가 지금 아는 소동파의 최고의 작품들을 탄생시켰고 게다가 소식보다 소동파로 더 유명한 그가 동파라는 호를 지은 것도 바로 황주에 있을 때였다.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이 없어서 동쪽 언덕에 직접 집을 지어 초당(草堂)’이라 이름하였고 그도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호를 지었다. 1천 년 전의 동파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인물이 되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풍부하고 값지다.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일본 관동대지진 화재 속에서 구해낸 불후의 명작

서예 작품은 감상하는 데 난이도가 비교적 높다.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구상적인 예술이 아니라 비교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예는 외관으로 보이는 게 닮았다/비슷하다라고 느끼는 걸 감상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희곡을 감상할 때 배우의 창법이나 몸놀림을 보는 것처럼 감상해야 한다. 창법과 몸놀림은 서예와 회화에서 말하는 필묵의 조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한식첩은 서양 열강들이 원명원에서 약탈하고 불을 지를 때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 건져내어 민간에 소장되었다가 1922년 일본인 손으로 넘어갔다. 당시 일본의 기구치 세이도(菊池惺堂)에 의해 소장되었는데 바로 다음 해, 19239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며 도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그때 소장가 기구치 세이도는 불길 속에서 소동파의 한식첩을 필사적으로 꺼내왔다. 비록 불에 탄 흔적은 여전하지만 시문과 서예 작품에는 손상이 없었다. 1937년 이 작품은 일본 교토에서 전시되었고, 1948년에서 1949년 사이(국부천도 시기) 전 교육부 장관(왕스졔王世杰)이 기구치 세이도를 설득하여 겨우 구매할 수 있었고, 1950년에 타이베이로 가져와, 고궁에서는 그후에 구입하여 소장하게 되었다. 미술사에서 말하는 역대 3대 행서 서예작품 모두 지금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自我來黃州。已過三寒食。年年欲惜春。春去不容惜。今年又苦雨。兩月秋蕭瑟。臥聞海棠花。泥燕支雪。闇中負去。夜半有力。何殊病少年。子(點去)。病起頭已白。春江欲入戶。雨勢來不已。雨(點去)。小屋如漁舟。濛濛水雲裡。空庖煮寒菜。破竈燒濕葦。那知是寒食。但見烏銜。君門深九重。墳墓在万里。也擬哭塗窮。死灰吹不起。右黃州寒食二首。

이 시를 간략하게 해설한다면, 소동파가 황주로 유배된 지 3년째 되는 한식날을 맞게 된 때 그의 심경을 그린 것이다. 그는 항상 봄날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지만 봄날은 언제나처럼 훌쩍 지나가 버린다는 첫 마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슬픔을 전하고 있다. 또한 봄철에 연속 2개월 동안 비가 내리며 그 작은 집이 일엽편주 마냥 물에 떠내려 가는 듯하다며 당시 처해 있는 외적인 환경을 말하고 있다. 시 구절에 누워서 해당화 지는 소리를 듣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꽃잎이 지는 소리는 실제로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쓴 게 너무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시문 끝에 까마귀가 지전을 물고 날아든 걸 보고서야 한식날이라는 걸 감지하였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성묘도 갈 수 없다는 현실과, 가다가다 헤매다가 더 이상 길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통곡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슬픔, 끝으로 가장 슬픈 건 타버린 재처럼 다시는 기사회생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마지막 한 마디이다.

소동파가 황주에서 쓴 가장 절망적인 작품이다.


소동파 인생에서 3, 인생의 변곡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우리가 말하는 급제 또는 승진 또는 결혼 또는 아들이 탄생해서 등의 기쁜 일들이 아니라 수 차례의 좌천,유배에서도 보통 최악의 환경으로 불리는 황주(黃州, 오늘 날의 후베이 황강), 혜주(惠州, 오늘 날의 광둥성(廣東省) 후이저우시(惠州市)), 담주(儋州, 오늘 날의 하이난(海南))로의 좌천을 지칭한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이 한 마디로도 증명할 수 있다.

問汝平生功業,黃州、惠州、儋州

평생 공적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황주, 혜주, 담주라고 답하리라.”

실제로 이 3곳에서의 생활 여건이 가장 어려웠다. 그러나 이 3곳에서 그의 인생관이 바뀌었고, 그의 명작들이 창조되었으며, 상상하기 힘든 인생 슬럼프에서도 유머감각을 발휘한 것만으로도 존경스럽고 인간미가 넘치는 인물이다. -白兆美 원고/보도: 백조미

為提供您更好的網站服務,本網站使用cookies。

若您繼續瀏覽網頁即表示您同意我們的cookies政策,進一步了解隱私權政策。 

我了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