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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동화 정책 🪧
타이완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남긴 ‘2·28사건’ 79주년을 앞두고, 어제 <포르모사 문학관> 시간에는 백색테러 시대 국가폭력을 겪은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특히 원주민 작가 리그라브 아우(Liglav A-wu)가 30년에 걸친 조사 끝에 발표한 《은은한 빛(隱隱微光)》을 중점으로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책에는 피해자와 유가족의 증언뿐만 아니라, 당시 원주민을 관리하는 정부 기구까지 함께 담겨 있는데요. 오늘은 그 연장선에서 이 고통의 현장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관련 프로그램:
[2·28평화기념일] 30년의 목소리, 원주민 백색테러 기록 《은은한 빛(隱隱微光)》
가장 먼저, 타이완의 원주민 정책부터 살펴보죠. 17세기 중국 한족이 타이완으로 이주하면서 원주민은 점차 생활 터전을 잃고 산간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요. 이후 19세기 후반, 외국 세력의 타이완 침입이 빈번해지자, 청나라 정부는 원주민이 살던 지역을 관리 범위로 포함시켜 개발에 나섰습니다. 이어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초기에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교육과 무력 진압을 병행하는 이중 정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전면적인 동화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일본 국기를 들고 있는 원주민들 - 사진: 위키백과
산지치안지휘소 12곳 👀
다음으로 1945년 이후부터 1980년대 민주화까지, 국민당 정부는 ‘산지 평지화(山地平地化)’라는 동화 정책을 통해, 원주민의 언어와 전통문화를 금지하고 사상 통제를 실시했습니다. 특히 1950년대에는 원주민 사회를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타이완 곳곳의 입산구에 12개의 ‘산지치안지휘소(山地治安指揮所)’를 설치했습니다. 경찰 조직과 기능이 겹치면서 결국 1959년 폐지되었지만, 약 10년 동안 치안지휘소는 국가의 눈과 귀가 되어 원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안겼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관련 국가 기록이 공개됨에 따라, 치안지휘소의 실체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데요. 지난 2023년, 국가인권박물관은 원주민문화사업기금회와 협력해, 자이(嘉義) 아리산(阿里山)에 있는 ‘우펑(吳鳳)산지치안지휘소’, 그리고 타오위안 다시(大溪)의 ‘타오위안산지치안지휘소’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편을 공개했습니다. 이 두 장소의 이야기도 《은은한 빛》에 수록되어 있죠.
산지치안지휘소와 관련 기구의 조직도 - 사진: 국방부
1950년대 국가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원주민 피해자에는 민족자결 의식을 지닌 지식인이 특히 많았는데요.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은 아리산 저우족(鄒族) 출신의 정치가이자 음악가 가오이성(高一生, 'Uongʉ'e Yata'uyungana)입니다. 지금 듣고 계신 노래는 그가 아내를 위해 만든 곡 ‘봄의 여신(春之佐保姬)’입니다.
아리산 저우족의 지도자 👨 가오이성
어릴 때부터 음악과 문학에 재능을 보인 가오이성은 일본 정부가 설립한 원주민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타이난사범학교에 진학해 고등교육을 받은 최초의 저우족 원주민이 되었습니다.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원주민 자치구’의 이념을 제시하며 부족이 독립적으로 발전한다는 비전을 내놓기도 했죠. 졸업 후에는 고향에서 교편을 잡으며 지역 농업 발전에 힘썼고, 또 제도 속 불평등을 바꾸기 위해 1945년 초대 우펑향(현 아리산향) 향장을 맡아 부족의 공공사무에 투신했습니다. 1950년 우펑산지치안지휘소가 설립된 후, 형식상 향장이 지휘소 지휘관을 겸임했지만, 실제 권한은 군 출신 부지휘관에게 있었습니다.
1947년 2·28사건 당시로 돌아가 보면, 시민과 정부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자이 시내 역시 혼란에 빠졌는데요. 자이 지역 인사들로 구성된 처리위원회가 아리산 저우족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향장이었던 가오이성은 일본군 출신의 청년 탕수런(湯守仁, Yapasuyongʉ Yulunana)을 중심으로 저우족 민병을 파견해 정부군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족의 중리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외성인 출신의 타이난현장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탕수런(좌)과 가오이성(우) - 사진: 위키백과
2·28사건이 군의 진압으로 마무리된 후, 저우족은 정부에 무기를 반납하고 충성을 표해 공식적인 문책을 피했습니다. 또 가오이성이 구해준 타이난현장은 그 은혜를 보답하겠다며 아리산 일부 농장의 경영권을 저우족에게 넘겼고, 덕분에 가오이성이 꿈꾸던 원주민 자치의 가능성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죠.
정부의 눈엣가시가 된 원주민 엘리트들... 📌
하지만 이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아직 산간지역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원주민의 무장 저항을 두려워해 당장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가오이성이나 탕수런처럼 고등교육을 받고 자치 의식을 지닌 원주민 엘리트들은 결국 정부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3년 후인 1950년, 정부가 공산당이 아리산 지역에 침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가오이성과 탕수런은 과거 공산당 관계자와 접촉한 사실을 인정했고, 치안지휘소의 엄격한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52년, 정보망과 체포 명분을 확보한 당국은 간첩 은닉과 농장 자금 횡령이라는 혐의로 아리산 저우족을 겨냥한 대규모 체포 작전을 벌였는데요 그 결과, 가오이성과 탕수런을 포함한 원주민 6명이 체포되어 1954년 처형되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탕수런(좌)과 가오이성(우) - 사진: 국가인권박물관
국가폭력에 의해 침묵에 빠진 원주민들 🤫
가오이성은 약 2년의 수감 생활 동안,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가족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고, 동시에 음악을 통해 하루하루를 견디며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냈습니다. 앞서 들려드린 노래 ‘봄의 여신’은 바로 그가 감옥에서 아내를 떠올리며 만든 곡이고, 그는 편지에서 아내가 이 노래를 듣고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었습니다. 가오이성의 딸은 어머니가 말년에 치매를 앓았을 때도, 이 노래가 나오면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고 합니다.
정부의 조직적인 낙인과 왜곡으로 인해, 가오이성을 비롯한 저우족 엘리트들은 부족 사회 안에서도 배척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가족들 역시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죠. 독재정권 아래서 누구도 이 사건을 입에 올릴 수 없었고, 부족 전체는 집단적인 침묵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우족 사회는 의도적으로 정치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가오이성이 앞장서서 심었던 원주민 자치의 씨앗도 점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가오이성의 음악 재능을 물려받은 후손들 🎶
가오이성은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지만, 그가 지닌 음악적 재능만큼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습니다. 장녀 가오쥐화(高菊花), 그리고 손녀 가오후이쥔(高慧君), 가오레이야(高蕾雅)는 가수가 되었고, 손자 가오충원(高崇文)과 가오젠슝(高建雄)은 트롬본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음악의 계보 뒤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희생이 있었는데요. 딸 가오쥐화는 원래 미국 유학을 예정했지만, 아버지의 수감으로 장학금을 포기하고 노래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가요계에서 점차 이름을 알렸으나, 정부의 지속적인 감시 때문에 정식 데뷔의 기회마저 빼앗겼고, 심지어 외국 군인을 상대로 성적 착취를 강요받는 상황까지 내몰렸습니다.
30년간 이어진 고통... 😖
또한 당국이 1971년 실행한 ‘징산 프로젝트(靖山專案)’에서 가오쥐화를 포함해 타이중 사범학교 출신 원주민 학생들은 과거 가오이성이 주도했던 독서회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요. 이 독서회는 사실 방과 후 보충 학습에 불과했음에도, 정부는 이를 공산주의 집회로 왜곡했습니다. 이러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오쥐화에게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가오이성 장녀 가오쥐화의 자수증 - 사진: 국가인권박물관
2·28사건과 백색테러가 남긴 상처는 그 시대에만 머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당사자의 자녀와 손주 세대까지 오랜 시간 이어졌죠. 역사적으로 권력에서 배제되어 왔던 원주민은 국가폭력 앞에서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그저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오이성과 함께 처형된 탕수런의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전쟁에 동원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타이완으로 돌아와도 또다시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원주민에게 허락된 선택권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삶이었죠.
은방울 같은 화려한 목소리가 숲을 넘어 오래도록 퍼져 나가길 🎵
우리는 그 시대를 직접 살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들을 계속 듣고, 말하고, 기록할 때, 역사는 비로소 잊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원주민 운동은 과거에 비해 많은 진전을 이뤘으나, 아직 가야 할 길은 멉니다. 노래 ‘봄의 여신’ 가사처럼, 은방울 같은 화려한 목소리가 숲을 넘어 오래도록 퍼져 나가기를 바라봅니다.
다음주에는 계속해서 ‘타오위안산지치안지휘소’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趙靜瑜,「人權館影像紀錄解密 原住民族白恐歷史記憶重現」,中央社。
2. 〈山地治安指揮所〉,國家人權記憶庫。
3. 張尹嚴,「原住民領袖高一生懷抱著家鄉自治的夢想,卻成了當局羅織他犯罪的依據(上)」,故事 StoryStudio。
4. 張尹嚴,「原住民領袖高一生懷抱著家鄉自治的夢想,卻成了當局羅織他犯罪的依據(下)」,故事 Story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