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안진경 '제질문고' 2/2
-2026.02.21.-국립고궁박물원 제대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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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원(이하 약칭 ‘고궁’) 개원 100년, 타이베이에서의 고궁 재개원 60년, 쟈이에서의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이하 약칭 ‘고궁 남원’) 개원 10년 등 중요한 해를 맞아 2024년부터 올해까지 특별 기획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주말(2/14) 고궁 남원 ‘갑자만년’ 특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국보이자 타이베이 고궁 개원 60년 이래 단 3번밖에 대외 전시되지 않은 당나라의 충신이자 그만의 해서(楷書) 서체(顔體-안체)로 1,200여 년동안 후세 문인과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안진경(709-785년)이 살아온 시대와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조카 안계명을 추도하기 위하여 서기 758년도에 쓴 제문의 초고 ‘제질문고’의 예술성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국립고궁박물원 서화문헌처 천젠즈(陳建志) 연구원과의 인터뷰 및 ‘제질문고’ 내용의 한글 번역을 공유한다.
2026년1월말 자료에 따르면 문헌과 서적을 포함하여 고궁에는 총 69만9,119점/권의 소장품이 있고, 이 가운데 국보 48,401점/권, 중요고물(한국의 ‘보물’과 유사한 등급) 17,408점/권이 있다. 이 가운데 대다수는 희귀도서류와 황제의 조서나 대신들의 상소문 등을 포함한 각종 문서들이다. 이러한 문건들은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귀금속보다 훨씬 더 중요시 여겨지는 문화유산이다.
국보 가운데에서도 70점은 전시 기간이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장고에서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이동의 제한도 있다. 안진경의 ‘제질문고’는 바로 그 70점 중의 하나이며, 전에도 방송에서 소개해드린 북송시대 범관의 ‘계산행여도’, 곽희의 ‘조춘도’, 이당의 ‘만학송풍도’ 역시 이에 속한다. 이들 70점에 대해서는 무분별한 이동이나 접촉으로 인해 손상을 유발하게 하는 여느 행동도 불허한다. 이게 단지 고궁의 소장품이 아닌 인류의 문화 유산이기 때문이라서 그렇다고 믿는다.
고궁 서화문헌처 천젠즈 연구원은 고궁에 재직했던 대선배님들이 규정한 제한 전시 유물에 대한 보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깨트리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황제’가 살아 돌아와도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제질문고’는 안진경이 그의 조카 안계명을 위해 쓴 제문의 초고이다. 제문은 안계명이 희생 당한 지 2년 후에 작성한 것인데, 그건 희생된 후에도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평정되지 않아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희생될 당시의 상황을 짧막하게 서술한다면은…
당나라 현종 천보14년(서기 755년) 안록산과 사사명을 위시한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7년 간 계속된 반란은 당나라가 성세에서 점차 쇠락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당나라 서예 명가 안진경의 사촌형과 조카는 당나라 정통 황제인 현종에 충성하며 반란군에 맞서 적극적으로 성을 지키다가 순난하였다. 안진경은 극도로 비통한 상황 아래서 ‘제질문고’를 썼고, 이는 그가 친필로 기록한 당나라 안사의 난에 관한 직접적인 사료가 되기도 하여 역사적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안사의 난 때 안진경의 사촌형 안고경은 상산군 태수로 부임해 있었는데 반란군들이 성을 포위해 올 당시, 아군에 속하는 군대를 거느리는 태원 절도사는 물건너 불구경을 하듯 위태로운 상산군에 병력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홀로이 적군에 맞서 싸우던 안고경의 상산군 성채는 반란군들에 의해서 함락되었고, 상산군태수 안고경과 그의 아들 안계명 모두 희생되었다.
안사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는 않았으나 서기 758년, 안진경의 사촌형 안고경과 조카 안계명의 시신을 수습할 기회가 생겨 안진경은 그의 조카, 안계명의 친형으로 하여금 시신을 찾아와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는데 찾은 건 단지 안계명의 머리밖에 없었다. 당시 참수를 당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안진경은 안씨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과 인품을 가진 조카 안계명에 대한 사랑과 비통함 그리고 반란군과 그때 구원병을 보내지 않은 태원절도사에 대한 원망 등을 제문으로 써내려 갔는데, 쓰고 지우고 또 쓰고 고치고 하는 과정에서 그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희대의 걸작으로 남은 게 바로 안진경의 ‘제질문고’이다. 깨끗하게 베껴 써서 제사에 쓰였던 추도문은 당연히 불에 태워 제사를 지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외에 사실 그의 사촌형 안고경을 추도하는 제문도 당연히 썼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아서 조카를 기리는 제문의 초고만이 후대 사람들이 아끼며 잘 보존해 와서 근 1260년 후에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 필자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성(書聖) 왕희지(303-361년)의 육필 서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안진경의 ‘제질문고’는 서예연구, 미술평론가 등 전문가들이 공인하는 100% 안진경의 친필이라 더욱이 귀하다.
왕희지의 육필이 남아있지 않는 원인은 아마도 1,700여 년 전이라는 너무 오래 전의 것이라서, 또는 당나라 태종이 그의 글을 너무 사랑해서 죽을 때 다 가져가서 사라졌을 것인데, 그렇다면 안진경의 ‘제질문고’는 왜 아직도 남아 있을까? 그건 마침 ‘예술가 황제’라는 별명이 붙은 북송시대 송휘종(1082-1135년)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착과 보존에 기인하였다고 본다. 송나라는 ‘중문경무’의 시대로 문화를 높이 여겼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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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立故宮博物院書畫文獻處助理研究員陳建志: …,最重要的就是它是應該是目前傳世唯一的真跡,所以你要從書論去驗證的話,只能夠靠這件作品,所以我覺得它的藝術價值啦、文獻價值都在這個祭稿裡面可以表現出來。 國立故宮博物院書畫文獻處助理研究員陳建志: 就這一件,目前最早看到就是宋徽宗趙佶的時候,他在′宣和書譜′裡面就有紀錄下來,這件作品在他的朝代裡面收藏。所以他跟唐太宗不同的是,他沒有跟他兒子說「兒子啊,我要過世的時候,我要帶走」… |
(음원, 고궁 서화문헌처 천젠즈 연구원) …, 가장 중요한 건 이 작품은 현존 유일한 친필이며, 서론검증(서예에 관한 의론과 검증)을 하려면 이 작품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술적 가치나 문헌적 가치 모두 바로 이 제질문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음원, 고궁 서화문헌처 천젠즈 연구원) 지금까지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송휘종 조길의 ‘선화서보’입니다. 이 작품은 송휘종 시대에 소장했다는 겁니다. 그는 당태종과 달리 내가 죽거든 이걸 가져가련다..와 같은 말은 그의 아들 송흠종에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
안진경의 ‘제질문고’가 전시될 때, 제발 직접 와서 보실 것을 진심으로 강력 추천드립니다. 필자가 아무리 바빠도 이번에 고궁 남원을 방문하여 ‘제질문고’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감동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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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立故宮博物院書畫文獻處助理研究員陳建志: …,當它展出來的時候,不管是有什麼風風雨雨,一定要到現場看這件作品。因為它真的就是可能就是像70件限展限提(文物),42天內展出,一定是要再休息三年這個規矩,故宮不會去打破這個規矩,所以一定要把握時間,42天內看到,因為我們不知道什麼時候再展出嘛,可能是五年十年,但是,每一次展出到博物館,到展櫃前面看這件作品。我覺得是對於喜歡的或者想要認識(此作品)的大家都是非常重要的一個訊息。 |
(음원, 고궁 서화문헌처 천젠즈 연구원) …, 전시가 될 때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전시 현장에 와서 감상해야 합니다. 이 작품처럼 이동과 전시가 제한된 70점의 경우 전시 기한은 42일이며, 전시 후에는 최소 3년 동안 수장고에 보존해야 하기 때문인데, 고궁은 이러한 규정을 절대 위반하지 않을 것이므로 42일 전시 기간을 제발 놓치지 마세요. 언제 다시 전시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5년 또는 10년, 여하튼 전시될 때에는 박물관에 오셔서, 진열장 앞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세요. 이 작품을 좋아하는 분 또는 이 작품을 알고 싶어하시는 분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라 생각됩니다. |
원문은 사진을 참조하시고, 필자의 번역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번연문은 풀버전 음원에도 있습니다)
당(唐) 안진경(顏真卿, 생몰 709-785년)의 서기 758년도 작품 ‘제질문고-祭姪文稿-(조카를 위한 추도문(제문) 초안)’.
제질문고의 본문 길이는 77cm. 너비 28.2 cm., 후대 소장가들이 제(題: 작품 앞에 관계된 글이나 시문)와 발(跋: 작품 끝에 본문 내용과 관련한 내용을 적은 글)을 시대 별로 삽입하여 두루마리 형식으로 표구를 하여 전장 215cm.로 보전되어 있다.
(본문 번역에 파란 색 괄호 안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추가한 내용입니다.)
(제질문호 본문)
건원(乾元) 원년(서기 758년), 무술년 9월 경오 초사흘째 되는 임신일에, 13째 숙부는 황명을 받든 은청광록대부로 포주 제군사를 총괄하며, 포주자사이자 상경거도위, 단양현 개국후 진경(眞卿)이 (제사용) 청주와 여러 제물을 올려 돌아가신 조카, 증찬선대부(추서된 관직 명칭) 계명(季明)의 영전에 제사하며 고하노라.
아, 그대는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어려서부터 덕행이 뛰어났으며, 종묘의 제기와도 같은(즉 국가의 기둥이 되는 인재, 아주 높은 재능을 가진 자를 뜻함), 가문의 우수한 자제로 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는데, 살아갈 인생 길은 이제 복과 평안을 누리리라 기대했거늘, 어찌하여 역적이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단 말인가.
그대의 부친은 온 정성을 다해 임무를 받들어 상산의 태수로 부임했고, 나 또한 명을 받아 그때 평원에 있었네. 형님은 나를 아끼어 그대를 시켜 소식을 전하게 했지. 그대가 돌아와 머무르며 이에 토문(요새의 명칭)을 열었고, 토문 전투에서 흉악한 적의 기세는 크게 꺾였네. 그러나 반역 신하들(아군의 병력을 거느리는 관원)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구원하지 않았고, 고립된 성은 포위되어 압박을 받았네. 아버지는 잡히고 아들은 죽어, 둥지가 무너져 모든 게 깨지듯 집안이 송두리째 무너졌네.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그치지 않는구나, 누가 이토록 독하게 해하는 건가. 그대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는데, 내가 백 번의 목숨으로도 살려 내지 못하는 구나.
아, 슬프도다. 나는 하늘의 은혜를 이어 받아 하관으로 옮겨 다스리게 되었고, 근래에 이르러 당질 천명(안계명의 형)이 상산이 함락되었을 때 그대의 머리와 관을 수습하여 마침내 함께 이곳으로 돌아왔네. (안계명은 반란군이 목을 베어 처형하여서 시신을 완전체로 찾지는 못하였고, 실제로 사건 발생 2년 후 원래 자리에서 머리만을 찾아 돌아옴)
그대를 어루만지며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비통하고, 놀람과 슬픔으로 내 얼굴색마저 변하고 떨리네. 머지않은 길일을 기다려 그대의 묘소를 정하고자 하니, 혼령이 알아듣는다면 객지에서 오래 떠도는 것에 대해 한탄하지 말라(떠도는 영혼을 내가 위로하겠노라).
아, 슬프도다. 이 제물을 흠향하소서.
(제질문고는 초고로 실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 내용을 축문으로 단정하게 다시 옮겨 쓰고, 제사를 지낸 후 불에 태우게 되므로, 제사 때 소리 내어 읽은 제문은 존재하지 않으나, 안진경의 심경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이 소중한 초고는 1,249년째 보존되어 오고 있다.)
‘갑자만년’ 고궁 개원 100주년을 축하하는 로고는 ‘고궁 100+’이다. 즉 고궁은 이미 100년 동안 유물들을 잘 보전하고, 보존하며 연구해왔는데, 100년이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100년을 향해 매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떠한 특별한 해, 특별한 주제가 있어서 안진경의 ‘제질문고’를 전시실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 유물을 아끼는 마음에서는 (작품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자주 나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래도 생애에 또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욕심은 숨길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다. 필자와 인터뷰한 큐레이터 천졘즈 연구원은 ‘계속해서 다음 단계의 100년을 향해 가는 중이라 안진경의 육필 제질문고를 나중에 전시실에서 또 볼 수 있는지는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白兆美
취재/사진/원고: 백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