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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위안 산지치안지휘소 👀
2·28평화기념일이 지나고 어느덧 3월이 찾아왔습니다. 아직은 바람이 조금 차갑지만, 멀지 않은 봄을 기다리기에는 딱 좋은 시기죠.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그 기억 위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기에도 어쩌면 가장 어울리는 계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950년대, 타이완 정부는 원주민 사회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타이완 곳곳에 총 12개의 ‘산지치안지휘소(山地治安指揮所)’를 설치했는데요. 이 지휘소들은 대부분 교통 요지에 자리 잡고, 부족 사람들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지난주 소개해 드렸던 자이(嘉義)의 ‘우펑(吳鳳)산지치안지휘소’는 아리산(阿里山) 지역의 최대 중계역인 ‘펀치후(奮起湖) 기차역’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원주민 작가 리그라브 아우(Liglav A-wu)가 작성한 《은은한 빛(隱隱微光)》에 따르면, 이 역에 정차한 기차는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고 하는데요. 그 사이 배치된 정보원들이 열차에 올라 승객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검사했고, 감시 대상자의 경우 몇 번 기차를 탔는지, 언제 도착했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관련 프로그램:
[2·28평화기념일] 30년의 목소리, 원주민 백색테러 기록 《은은한 빛(隱隱微光)》
아리산 펀치후 기차역 - 사진: 아리산국가공원
타오위안(桃園)의 산지치안지휘소도 같은 상황이었는데요. 지휘소가 소재했던 다시(大溪)는 원주민 타이야족(泰雅族)이 살아온 자오반산(角板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자오반산에는 장제스(蔣介石) 전 총통의 별장이 있어 경비가 더욱 삼엄했고, 백색테러 시대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원주민이 특히 많았던 지역 중 하나로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조용히 한 걸음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 시대 지식인의 맥이 끊겼다... ⛓💥
백색테러가 타이완 사회에 남긴 상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한 시대 지식인의 맥이 끊겼다는 사실입니다. 의사, 교사, 사상가, 정치인, 화가, 작가까지 사회를 이끌던 수많은 이들이 국가폭력 앞에 먼지처럼 사라진 겁니다. 특히 원주민 엘리트은 더 큰 표적이 되었는데, 자치와 민족자결 등 ‘위험한 생각’을 품은 존재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죠. 그 결과, 이미 구조적으로 약세에 놓여 있던 원주민 사회는 스스로 발전할 기반을 잃었고, 더 깊은 억압 속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4년, 6명의 원주민 엘리트가 처형되었습니다. 아리산 저우족(鄒族) 출신의 가오이성(高一生), 탕수런(湯守仁), 팡이중(方義仲), 왕칭산(汪清山), 그리고 자오반산 타이야족의 린루이창(林瑞昌)과 가오저자오(高澤照)입니다. 이 중 린루이창은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명망이 높았던 원주민 지도자고, 가오저자오는 다시 지서 소속 경찰이었습니다.
1954년 처형된 6명의 원주민 엘리트 - 사진: 국가인권박물관
두 사람은 같은 자오반산 지역 안에서도 서로 다른 취락 출신이었는데요. 이는 단순한 개인의 처벌을 넘어, 자오반산 전역을 장악하려는 국가권력의 의도가 담긴 조치였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당시 타오위안 산지치안지휘소에는 30명에 달하는 인력이 배치될 만큼 규모가 컸고, 별도의 전담 사무실 설립 계획까지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부 타오위안의 타이야족과 남부 자이의 저우족은 왜 하나의 사건으로 묶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들이 타이베이에서 공산당 관계자와 만나 적 있고, 같은 원주민 엘리트로서 서로 긴밀히 교류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은 없었지만, 그 ‘만남’ 자체가 간첩 혐의를 씌우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1951년 아리산에서 만난 린루이창(좌4), 가오이성(좌2), 탕수런(우3) - 사진: 위키백과
타이완 최초의 원주민 엘리트 린루이창 🧑🏫
늘 원주민 권익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린루이창은 타이완 최초의 원주민 정치 엘리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저항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닿아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일본 정부에 맞섰던 인물입니다. 원래 타이야족은 지금의 신베이 산샤(三峽) 지역에 거주했으나, 일본군의 공격 이후 자오반산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1909년 항복의 자리에서 린루이창의 아버지는 10살이었던 린루이창을 인질로 내보냈는데, 대신 아들에게 반드시 현대식 교육을 제공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총칼 앞에서 내린 결단이었지만, 동시에 미래를 향한 선택이기도 했죠.
자오반산 원주민 학교와 타오위안 초등학교를 마친 린루이창은 오늘날 타이완대학교의 전신인 타이완총독부 의대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로서는 극히 드문 원주민 출신의 엘리트 코스였죠. 졸업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하는 한편, 일본인과 원주민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도 했습니다. 그 역량을 인정받아 1945년 타이완총독부 평의원으로 초빙되어 원주민의 자치와 공공사무에 적극 투신했습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린루이창 - 사진: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후 선거에서 첫 번째 원주민 성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의회에서 원주민 인재 육성, 정치 참여 확대, 행정 제도 개선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특히 타이야족이 원래 살던 땅을 되찾기 위한 토지 반환 운동은 그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는데요. 그러나 이 요구는 정부로부터 거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 선전과 연계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반란과 횡령이라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렇게 1954년 6명의 원주민 엘리트가 총성과 함께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 시대를 이끌 수 있었던, 공동체의 미래가 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어어서 타이야족 출신 싱어송라이터 야와이 마우링(Yaway Mawring)의 ‘넝굴(藤蔓)’을 함께 들어보시죠. 굳센 생명력을 가진 넝글로 원주민의 강인함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타이야족 엘리트 린루이창 - 사진: 위키백과
유족에게 남겨진 상처... 😖
사형 집행 이후, 정부는 자오반산 곳곳에 공고문을 붙여 공동체 전체를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린루이창의 가족 역시 깊은 상처 속에 놓였는데, 교사로 일하던 장남은 감시와 압박 속에서 근무기를 계속 옮겨 다녀야 했고, 둘째 아들은 공범으로 지목되어 수감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린루이창이 남긴 유서도 무려 60년이 지난 뒤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역사학자 우루이런(吳叡人)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린루이창은 2·28사건 당시 부족 사람들의 개입을 막았지만 원주민과 관련된 의제 앞에서는 분명히 입장을 내세웠다”며, “바로 그 선명함 때문에 ‘잠재적 반정부 인사’로 여겨졌다”
《은은한 빛》에는 린루이창 아들 린마오청(林茂成)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시신 인도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 타이베이 극락 장례식장(極樂殯儀館)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군인이 아무렇게나 시신 하나를 가리키며 내 아버지라고 말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시신을 뒤집어 확인했지만 아버지가 아니었다. 결국 포르말린이 가득 찬 보관실에서 시신을 한 구 한 구 뒤집어가며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린루이창 일가족 - 사진: 위키백과
새로운 시작 🌸 로징 와탄 기념공원
다행히 린루이창의 정신은 아들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기억하며 원주민 의료 발전에 힘쓰는 한편, 민주화 이후에는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분주해 왔습니다. 수많은 노력 끝에, 2005년 자오반산에는 린루이창의 원주민 이름을 딴 ‘로징 와탄 기념공원(樂信·瓦旦紀念公園)’이 세워졌는데, 공원 안에는 린루이창의 삶을 기록한 공간과 가족을 기리는 빈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조 전망대에 오르면 자오반산 너머, 그들의 본래 고향인 산샤 방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고, 좁쌀이 익어갈 때면 황금빛 물결이 산을 가득 채웁니다.
공원 전망대를 향한 길 - 사진: 타오위안시정부
린루이창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었습니다. 타이야족 이름 로징 와탄(Losing Watan), 일본식 이름 타이 사부로(渡井三郎)와 히노 사부로(日野三郎), 그리고 한족 이름 린루이창(林瑞昌). 이 이름들은 타이완 원주민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하기 어려웠던 시대를 증언합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린루이창을 비롯한 원주민 엘리트들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듣고 기록하고 이야기해야 이들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죠.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戴寶村,「臺灣原住民政治案件與國家暴力(1945~1954)──以『湯守仁案』為中心」,原住民委員會。
2. 周婉窈,「悼念高一生、湯守仁、汪清山、方義仲、林瑞昌、高澤照」,台灣放送。
3. 台灣人的故事:樂信・瓦旦(Losin Watan),第一個原住民政治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