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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한가? 정치범 시신이 머문 ‘극락 장례식장’ ⚰️

1950년대 타이베이 유일의 장례식장 ‘극락 장례식장’ - 사진: 국가문화기억뱅크
1950년대 타이베이 유일의 장례식장 ‘극락 장례식장’ - 사진: 국가문화기억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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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테러 영화 <대몽> 🌫️ 흥행 지속 중 

1954년 타이완 백색테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대몽(大濛)>이 개봉한 지 3개월이 넘도록 꾸준한 화제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스오피스에서도 역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매출 1억 뉴타이완달러(한화 약 46억 원)를 돌파하며 흥행 역사 영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에서 15살 소녀는 사형을 당한 친오빠의 시신을 받기 위해 남부 자이에서 타이베이로 향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신을 인도받는 것 자체에도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서 소녀가 10원을 벌면 “오빠의 눈을 받을 수 있다”, 50원을 벌면 “오빠의 다리를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대사가 등장하는데요. 블랙 유머 속에 현실의 냉혹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작품이죠.


소녀가 향한 곳... 극락 장례식장 👼

수많은 노력 끝에 소녀는 결국 오빠를 집으로 데려오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대몽> 감독 천위쉰(陳玉勳)에 따르면, 1950년대 교사의 월급이 약 200뉴타이완달러 수준이었던 반면, 정치범 시신을 인도받기 위해서는 600~1000뉴타이완달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일반인이 감당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한 금액이었죠. 때문에 많은 시신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무연고 묘지에 묻히거나 해부 실습용 시신, 이른바 ‘카데바’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정치범 시신을 보관했던 장소는 타이베이의 ‘극락 장례식장(極樂殯儀館)’으로, 현재 린선공원(林森公園) 내 ‘창안 배수펌프장(長安抽水站)’ 자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정치범 시신 보관 외에도, 주로 정부 인사의 장례식을 치르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로는 중화민국 외교장관과 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낸 후스(胡適), 국민당 초기 권력 핵심 인물이었던 천궈푸(陳果夫), 위여우런(于右任) 전 감찰원 원장 등이 있었습니다.

타이베이 린선공원. 오른쪽 위에 있는 흰색 건물(창안 배수점프장)이 바로 극락 장례식장이 있었던 자리다. - 사진: 타이베이시정부

영화의 흥행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오늘은 영화 속 소녀가 향한 극락 장례식장의 이야기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번화가의 옛 모습... 일본인 공동 묘지 🪦

지금 MZ세대가 즐겨찾는 번화가 중산역(中山站)에서 도보로 약 10분만 걸으면 극락 장례식장이 자리했던 공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도심 한복판에 있죠. 그런데 지금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일본 식민지 시대 이 지역은 일본인의 묘지인 ‘산반차오(三板橋) 공동묘지’였습니다. 제3대 타이완총독 노기 마레스케의 어머니와 제7대 타이완총독 아카시 모토지로 등 일본 고위층들이 모두 이곳에 안장되었기 때문에 식민주의 색채가 강한 공간이기도 했죠. 그래서 지금 린선공원에서는 신사의 흔적인 ‘도리이(鳥居)’를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당시 “산반차오(三板橋)로 간다”는 표현이 사람의 사망을 의미하거나 욕설처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린선공원에 있는 도리이(鳥居) - 사진: 타이베이시정부

이 공동묘지를 관리하던 장례시설은 바로 극락 장례식장이 자리했던 공간에 있었습니다. 주로 타이완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화장과 장례를 담당했던 곳이죠. 1897년 세워진 후, 1942년 타이베이시역소에 의해 인수되면서 공영 장례 시설인 ‘타이베이 장의당(台北市葬儀堂)’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바로 극락 장례식장의 전신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장의당은 계속 운영되었지만, 이용 대상은 일본인에서 타이완인으로 바뀌었죠. 다만 화장을 위주로 한 일본인과 달리, 당시 타이완인은 대부분 가정에서 장례를 치르고 토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의당의 역할 역시 토장의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타이베이 유일의 장례식장 ⚰️

그러다 1949년 중화민국 정부의 타이완 이전과 함께 대규모 인구가 타이베이로 몰려들면서 장례 수요도 급증했습니다. 도시 공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타이베이시장이었던 유미젠(游彌堅)은 새로운 장례 시스템 구축과 화장 보급을 추진했는데요. 1950년 그는 타이베이 장의당과 그곳이 관리하던 류장리(六張犁) 묘지의 운영을 상하이 장례업 협회 이사장이었던 쳰중판(錢宗範)에게 맡겼습니다. 동시에 불교에서 말하는 서방극락 개념을 반영해 장의당은 ‘극락 장례식장’으로, 류장리 묘지를 ‘극락 묘지’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로써 극락 장례식장은 1950년대 타이베이에서 유일한 장례시설이 되었습니다.

타이베이 류장리 묘지 (옛 극락 묘지) - 사진: 국가인권박물관

당시 처형된 정치범들의 시신은 극락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유가족의 인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소녀의 이야기처럼, 대부분 본성인(本省人) 가정은 막대한 시신 인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또 가족이 시신을 찾는 과정에서 신원이 드러나거나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 될 위험을 우려해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편 중국대륙에서 온 외성인(外省人)의 경우, 가족 대부분이 대륙에 남아 있어 시신 수령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아무도 수령하지 않은 시신들은 극락 묘지에 매장되거나, 국방의학원으로 옮겨져 포르말린 탱크 속에서 보관되었습니다.

영화 속 소녀가 극락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오빠의 시신은 이미 국방의학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포르말린 탱크에서 하나하나 꺼내진 시신을 확인하며, 오빠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지난주 소개해 드렸던 백색테러 원주민 희생자 린루이창(林瑞昌)의 아들 린마오청(林茂成)이 겪었던 실제 경험과도 겹쳐 있습니다.

이어서 영화 <대몽>의 OST, 9m88의 ‘안개가 자옥한 밤(大濛的暗眠)’을 함께 들어보시죠.


국가폭력의 상징과 희생자가 한 자리에... 💧

하지만 극락 장례식장은 당시 타이베이 유일한 장례시설로서 정치범뿐만 아니라, 정부 고위층의 장례도 함께 치러지던 공간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그 시절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위층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지고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반면에, 정치범은 시신조차 제대로 안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인물과 국가폭력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시민이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던 거죠.

그렇다면 오늘날 타이베이 시립 장례식장은 언제 세워졌을까요? 사실 1956년 타이베이시는 처음으로 도시계획 검토를 진행했고, 일본 식민지 시대 계획에 따라 극락 장례식장 부지를 공원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장례식장 측과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었습니다. 1965년 ‘제일 장례식장(一殯)’이 설립되어서야 장례 업무는 본격적으로 시정부 체계 안으로 편입되었죠.


불법 건물로 이뤄진 ‘캉러리’ 🏠

하지만 주변 주민들의 이주와 정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대륙 저우산 군도(舟山群島)와 하이난섬(海南島)에서 온 외성인들이 극락 장례식장 주변에 불법 건축을 만들고 심지어 일본인 묘비를 재료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열약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결국 1,000여 가구, 그리고 170여 개의 노점상이 형성되며 공동체가 유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철거와 재정비를 둘러싼 갈등은 오랜 시간 이어졌고, 무려 10여 명의 타이베이 시장을 거친 끝에 1997년 타이베이 시장이었던 천수이볜(陳水扁) 집권 시기에 철거가 성사되었습니다. 6년 후 지금의 린선공원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과거 캉러리(康樂里)로 불렸는데요. 1980년대 타이완 뉴 웨이브 영화의 대표 감독 완런(萬仁)의 작품 《아들의 큰 인형(兒子的大玩偶)》과 《슈퍼 시민(超級市民)》에도 당시의 생활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이베이 도시 발전의 목격자 👀

극락 장례식장은 단순한 장례 공간을 넘어 타이완 장례문화의 변화, 그리고 전쟁 이후 타이베이의 발전을 담아낸 공간입니다. 무엇보다 영화 <대몽>을 통해 다시 조명되면서, 백색테러 시대의 기억이 정치범의 시신처럼 시간에 묻히지 않고 대중에게 전해지고 있죠. 다음에 중산역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린선공원에 들러 휴식을 취하면서 그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함께 바라보셔도 좋겠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極樂殯儀館〉,國家文化記憶庫。
2. 舒憶,「戰後「台北第一家殯儀館」今為「林森公園」胡適喪禮曾在此舉行|極樂殯儀館」,報時光。
3. 路那,「【黑色旅遊】第六站:林森公園.極樂殯儀館 《大濛》裡的真實場景」,重大歷史懸疑案件調查辦公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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